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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Mar 12. 2023

출생신고서를 쓰다가

아기 난 지 만 5일. 열 달 남짓 태명으로 불리던 아이가 마침내 이름을 얻었다. 아내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염두에 두던 이름 후보들을 추린 뒤 철학원에 의뢰하여 한자를 받아 결정한 이름이다. 철학원에선 아기의 한글, 한자 이름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금테를 두른 성명장을 보내주었다.


"모든 일에 삶에 지위가 높고, 삶의 뜻이 높은 사람이니, 열심히 나 자신을 갈고닦아 인생에 가장 높은 벼슬길에 올라 큰 뜻을 펼치며, 크고 창대한 삶을 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철학원에서 일러준 아기 이름의 설명이다. 마치 조선시대 명망 있는 사대부 같은 느낌도 든다. 이름에 이렇게까지 큰 뜻이 담길 줄은 몰랐다. 뜻풀이를 몇 번이고 읽어보며 참 좋은 말이다 싶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어느새 아기가 이름의 뜻처럼 되길 바라는, 부모의 욕심이 커져갔다. 그저 나와 아내에게 와준 자체만으로도 크고 창대한 존재인데 무얼 더 바랄 수 있을까 싶었던 마음이 무색해질 정도로. 이름에 담긴 원대한 뜻처럼 커주었으면 하는 욕심보다는, 아기가 무엇이 되든  자신의 뜻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이름을 결정했다.

 

고심 끝에 고른 아기의 이름을 동여 메고서 동사무소에 들러 출생신고서를 작성했다. 아기가 태어난 지 만 7일 만이었다. 한 장짜리 서류를 쓱 훑고서 빈칸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출생자 칸. 아이의 한글, 한자 이름을 성명란에 또박또박 적어냈다. 이후 차례대로 출생일시, 출생장소를 채웠고, 부모가 정한 등록기준지는  내 친할아버지댁이 있던,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주소로 정했다. 세대주 및 관계란에는 장인어른의 외손녀라 썼다. 출생자 칸을 다 채우고 나선 부모 칸. 부모 성명에 각각 나와 아내의 한글, 한자 이름을 적었다. 나와 아내가 진짜 이 아기의 부모가 된다는 사실이 명료하게 다가왔다.


출생신고서 작성을 마치고 얼마 뒤 새로 발급받은 주민등록 등본에는 처가어른, 우리 부부, 23으로 시작하는 주민번호를 받은 아기까지 3대의 이름이 새겨졌다. 아기는 그렇게 우리 가족과, 사회의 온전한 일부가 었다. 단 한 장의 서류를 작성하는 행정절차에 내 글씨가 채워지며 한 사람의 ‘공식적인’ 생이 시작된 것이.


동사무소에 갔을 때 출생신고서를 찾지 못해 헤매자 봉사하시는 분께서 친절히 위치를 알려주었다. 사망신고서 뭉치 아래 출생신고서 양식이 깔려있었다. 삶의 끝과 시작을 알리는 신고서가 겹쳐있는 모습을 보자 문득 내 아버지가 떠올랐다. 삼십여 년 전 오늘의 나처럼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내 이름출생신고서에 적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5년 전 여름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했을 것이다. 적어도 출생신고서를 쓰던 때의 아버지의 마음만큼은 헤아려볼 수 있게 됐다. 출생신고서는 아기의 출생을 알림과 동시에, 내가 진짜로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부모신고서이기도 했다. 이제야 부모라는 출발점에 서게 됐다.


내가 어렸을 적엔 아빠 엄마는 무척 어른처럼 느껴졌었다. 내 아기가 태어났을 때보다 내가 태어났을 적 내 부모님은 지금의 나보다 9살이 어렸다. 더하면 더했지 그때의 엄마 아빠 또한 서투르고 모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있게끔 날 잘 키워내셨다. 내가 아무런 기억도 없었을 갓난아기 시절부터 완벽하진 않더라도 최선을 다하셨을 것이다. 그 원동력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는지, 출생신고서를 쓰며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내 아기가 태어나 힘차게 내지르던 울음, 포동포동한 볼살 위로 떠오른 작지만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빛, 분유를 먹고 입을 오물거리며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 위로 떠오른 평화, 그 모든 게 출생신고서의 빈칸을 채워낸 나의 글씨 위로 흐르고 있었다. 사랑이었. 살면서 느꼈던 그 어떤 마음보다 온전하고 따뜻한 사랑이 '출생신고'라는 행정절차로 공식화됐다. 서류전형은 무사히 마쳤다. 이제는 실전이다. 서툴겠지만 행정절차를 대하던 마음으로 부모의 길을 걸어야 한다. 뭇 어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출생신고서의 부모 칸에는 나와 아내의 이름이 내 손글씨로 적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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