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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Aug 20. 2023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느 J형 인간의 소회

나는 전형적인 J형 인간이다. 시간을 통제하며 살 수 있다 믿는 편이다. 계획과 목표는 언제나 날 옆에서 든든히 지켜주는 동료이자, 날 이끌어주는 리더였다. 생각한 대로 잘 맞춰서 시간을 활용하고, 계획과 목표를 구상해 낼 때의 뿌듯함과 개운함을 느낀다.


스케줄러와 엑셀로 일정표를 쓰는 수준은 아니다. 단지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하는 게 가장 효용이 높은지 생각한 다음 그걸 실행하는 편이다. 가령 어딘가로 이동할 때 대중교통을 타야 한다면 버스보다는 지하철을 이용한다. 멀미가 없는 지하철에서 활자 하나라도 더 익힐 수 있는 생산성을 높이고 시민의 교양을 뽐낼 수 있기 때문이다.


퇴근하고 난 뒤에는 불확실성이 없는 순간이 가장 상쾌하다. 저녁에 하기로 맘먹은 것들이 가지런히 해낸 뒤 잠자리에 누울 때는 마치 두피 스케일링을 받은 것 같다. 이런 나의 시간 통제 불가침 영역을 침범하는 퇴근 30분 전 불의의 회식 이벤트라던지, 지인들의 술자리 제안은 참을 수 없는 P형 인간들의 가벼움이라 치부했다. 불의의 이벤트들을 받아들일 땐 괜스레 짜증이 났다.


이 기고만장한 J형 인간에게 경종을 울린 건 다름 아닌 내 유전자를 고루 물려받은 내 아기다. 아기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불확실성 그 자체다. 나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지만 그만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분유와 이유식을 먹는 주기, 잠에 드는 시간, 투정 부리고 칭얼거리는 순간들 모두 패턴을 갖고 있으면서도 매일매일이 새롭고 다르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모습에 비례해 앞으로도 더욱 더 날 놀래키고 벅차게 만들 것이다.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 믿던 J형 인간에게 그 유전자를 받은 생후 6개월 된 존재는 내 눈을 마주치며 옹알옹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아빠. 아빠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동안 내가 시간을 통제해온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날 통제하고 있었구나.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하는지가 나의 가치와 완성도를 평가하는 척도로서 쓰이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흐름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시간을 장악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현재에 충실하다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미래에 기대어 살고 있었다. 나의 생산성을 저해하는 일들을 짜증의 요소가 아니라,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임을 날 쳐다보며 배시시 웃는 아기를 보면서 이제야 깨달았다. 이토록 당연한 사실을 말이다.


앞으로는 살면서 내게 닥쳐올 불확실성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미국의 명상지도자 조지프 골드스타인의 말처럼 “계획은 단지 생각일 뿐”이라는 명제에 이제야 수긍한다. 모든 계획은 ‘구현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이라는 현재의 의사표명일뿐이다. 시간의 흐름에 날 오롯이 내던지고, 내게 닥친 지금이라는 시간을 또렷이 직시할 것이다.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말이다.


시간은 나를 이루는 물질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고 가는 강이지만, 바로 내가 강이다. 시간은 나를 파괴하는 호랑이지만, 내가 호랑이기도 하다. 시간은 나를 태우는 불이지만 내가 곧 그 불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Gorge Luis Bor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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