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샤에바 Chaeva Aug 09. 2020

만다라를 그리면 내가 보인다.

진정한 나를 품는 것은 무의식에 사는 나의 페르소나를 직면하는 용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기에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는데,
나의 이름은 무엇이 불러주어야 나는 비로소 꽃이 되는가?


 개성이 중요해진 시대가 오면서, 남들과 차별화된 나와 자아를 찾는 과정이 중요시됨을 넘어 거진 신성시가 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는 책 한 권은 꼭 <나>와 <자아>에 대한 고찰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내가 누군지 찾아 떠난 여정이 트렌드가 된 시점에서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진정한 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건 바로 <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유년기의 따뜻한 추억, 우연한 운명적인 계기, 특별한 개인적 경험들이 <나>를 형성하는 요소라는 뻔한 대답을 피한 이유는 무의식의 언저리에 있는 기억들을 인지하여 의식의 영역으로 데리고 오는 것은 <나>의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역할들이 요구되는 현대 사회에서 단 하나의 페르소나(개인이 사회생활 속에서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나 성격)를 가지기란 불가능하다. 상황과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 성격들을 마주하면서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고민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필수 과제가 되었다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지닌다는 말이 너무 복잡한가? 그럼 '방구석 여포'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삼국지에 나오는 포악한 명장인 여포처럼, 방구석 컴퓨터 자판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용맹하며 불의를 참지 않는 화끈한 양반이지만 방 밖으로 한 발짝만 나와도 방금 청학동 서당을 졸업한 선비처럼 조신해지는 사람들을 방구석 여포라고 한다. 


 즉, 방구석 여포들은 현실과 비현실,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과 낯선 공간이라는 대비되는 장소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방구석 여포의 진짜 페르소나는 화끈한 양반과 조신한 선비 중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둘 다'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란 단편적이지 않으며, 사회와 삶의 현장이 더 다양화되면서 다양한 자아 정체성의 표출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성격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의 조금 우스꽝스러운 예시이긴 하지만 요즘은 '방구석 여포'들처럼 온, 오프라인 공간의 역할에 따라 다른 자아 정체성이 생겨날 수도 있다. 이처럼 시공간적 공간 제약이 없어진 것에 비례하듯 각자의 페르소나도 더 세분화, 다양화되었다. 그러므로 우선, <나>의 자아가 상황에 따라 분리되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이제는 I, my, me, myself가 아니라 <myselves>의 시대가 도래했다.

 

Myself가 Myselves로 확장되었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의 의식을 외부에서 내부로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란, 혼자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특히나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낯선 환경과 상황에 덩그러니 놓이는 것이 매일의 과제인 낯선 곳에서 홀로 긴 시간 살아보면 낯선 것에 대처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어떤 성향과 성격의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나는 그런 과정을 몇 년 전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겪었다. 그 당시에 불어로 안녕과 고마워밖에 말하지 못해 인사성만 좋은 동양인이었던 나는, 나쁘게 말하면 프랑스에서 기가 꺾여 살았고 좋게 말하자면 나의 내향적 성향을 더 발견하고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나야말로 대한민국 방구석 여포였던 것이다.)

 조금 풀이 죽고 미묘하게 소심한 내 페르소나를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늘 주목받고 당당하고, 겁 없고, 심지어 조금 싹수없다는 평가까지 겸비한 한국에서의 페르소나를 억지로 꺼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누가 봐도 내가 억지로 애를 쓰는 부자연스럽고 안쓰러운 상황이 연출되어서 겸허히 나의 내향적인 페르소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인격의 <나>로서 낯선 곳에서 살면 어떤 일들이 생길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에 나의 새 페르소나로 프랑스에서 살았었다. 

 그런데 의외로 살만 했다! 그래서 고요하고 잔잔한 인격의 나도 <나>로 받아들였다.


 사회 활동을 하면서 자연히 역할에 따른 페르소나는 생겨난다. 프랑스에서 이러한 경험을 하기 전에도 상황, 장소, 역할에 따라 페르소나가 달라지는 경험을 했지만 그것은 인지 아래 무의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반대로 프랑스에서 있던 페르소나에 대한 경험은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전의 경험보다 직관적으로, 페르소나의 다양화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나의 의식을 외부에서 내부로 집중시켰다. 이전에는 남들이 바라보는 <나>에 대해서만 의식을 하고 타인의 기대치에 맞게 나의 페르소나를 조절했다면, 이제는 내면에 골고루 분포된 페르소나들을 인지하고 그들을 보듬기 시작했다. 이제는 남들의 기준에 미달하는 페르소나도 나의 인격이고, 자아임을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매일 새로운 형태의 만다라를 그린다.


완벽한 형태의 원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완벽한 존재가 아님은 만물이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세상 만물과 인간의 차이점은 있다. 금수와 인간의 차이는 인간은 끝없는 연습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


 프랑스에 있었을 때 나의 새로운 페르소나를 아무 과정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은 아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져 그동안의 고찰과 반성 끝에 그를 온전히 포용하게 되었는데, 긴 고찰을 하게 된 계기 자체는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미술 대학을 다니던 친구가 어디선가 만다라 컬러링 페이퍼를 가지고 왔는데, 나도 친구와 같이 색칠을 하다가 문득, 잘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눈에 잘 보이는 큰 영역으로 확장되는 만다라의 형태가 우리가 잘 인지를 하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직관적으로 눈에 띄는 의식의 형태로 나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다라의 기본 형태는 작은 점으로부터 전체로 확장되는 것이다. 잔잔한 물에 돌을 던지면 물의 표면에 파동이 일듯이 안에서 밖으로 퍼지는 만다라의 형태는 무언가의 자극을 받아 섬세히 움직이는 무의식의 세계와 닮아있다. 만다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장 크고 화려한, 가장 바깥에 있는 패턴이지만 작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중심부의 패턴이 견고하지 않으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만다라는 '원'을 뜻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원을 완벽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만다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린 만다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같은 모양, 같은 색을 지닌 패턴은 없다. 어떤 것들은 서로 모양이 다르고, 심지어 어떤 것들은 찌그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완전한 패턴들의 집합은 완전한 원처럼 보인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의 화합은 완벽에 가까운 형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페르소나들을 마주하는 것은 만다라를 그리는 과정이나 마찬가지이다. 나의 큰 인격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단일적인 페르소나인 myself가 아니라 여러 개의 복합적인 페르소나, myselves들이 모인 형태이다. 각각의 페르소나는 완벽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모여 형성한 것이 나이고, 내가 <나>가 되는 기반이 바로 나의 페르소나들이다. 


 이렇게 나는, 만다라를 통해 나의 내면을 보듬고 나의 페르소나들을 마주한다. 작은 점에서 큰 모양으로 처언처언히 확장하는 만다라를 그리며 나의 무의식들을 발견하고, 안아준다. 이렇게 매일 새로운 <나>를 마주하고 안아주는 과정이 이젠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 준다.


 그래서 나는 매일, 만다라를 그린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유명한 시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는데,
나는 도대체 그 무엇이 나를 불러 주어야 꽃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정답은 <나>만이 알 수 있다.

만다라를 그리며
나의 무의식이 의식으로,
작은 점에서 완전한 형태인 원으로 확장되는 것을 관찰해보자.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나를 향한 애정으로 비롯된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만다라로 나의 무의식과 내면을 보듬는 것을 시작한다면, 
비로소 내가 <나>를 발견하고 품어 사랑할 수 있으리라.

   



매거진의 이전글 나와 당신의 페르소나'들' :: 멀티 페르소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