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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기고래 Apr 26. 2024

첫사랑

나의 첫사랑은 누구인가

  나는 사랑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엄마아빠가 사랑해서 태어난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조숙했던 것 같은데 초등학생 때부터 드라마나 노래,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가치들, 이를테면 사람의 도리나 야망, 꿈, 돈 이런 많은 것들 중 실재하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 했던 내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작년에 내가 쓰고 아까웠던 지출은 어떤 것이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내가 사랑해 왔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정말 사랑 특화형 사람이다. 이 사랑 중에서도 첫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참으로 많은데 어떤 것을 나의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너무나 모호하여 오늘은 나의 첫사랑을 누구로 정할 것인지 글을 핑계로 생각해보려 한다.


  우선 첫사랑이 처음으로 사랑한 가족 이외의 사람이라면 함께 새롬 유치원 해바라기반을 다니던 도현이라는 친구다. 이 친구는 얼굴이 새하얗고 눈은 길쭉하게 찢어진 외커풀이 었는데 얼굴이 하얀 남자가 이때는 참으로 좋았다. 하지만 이때 나는 이 친구에게 말 한마디 걸어보지 못하고 유치원을 졸원하게 된다. 우리의 추억이 유일하게 남은 곳은 유치원 앨범인데 내가 도현이를 좋아한다는 걸 엄마가 선생님한테 귀띔했는지 소풍에서 선생님이 둘이 사진 찍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사진 속에서 말 한마디 나눠보지도 않은 애랑 사진 찍게 된 도현이는 내 어깨를 누르고 서있고 나는 쑥스러운지 좋은지 어깨가 아픈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다. 사진 옆에는 선생님이 메모지에다가 '앗 도현아~ 너무 누르지 마~ 아프잖아~'라고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해 놓으셨다. 


  멀리서 바라보며 말할 수 없이 좋아만 하던 가슴 아픈 짝사랑처럼 보이지만 졸원후 다른 유치원에 가자마자 나는 태양이라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아이와 사랑에 빠진다. 이 때는 일방향적 사랑이 아닌 오히려 남자애가 나를 더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했다. 나의 첫 쌍방의 사랑이었던 셈이다. 태양이는 생일파티에서 뽀뽀하고 싶은 아이를 부를 때 나만 불러내서 사탕 목걸이를 걸어주고 입에다가 뽀뽀를 했는데, 우리 아빠는 이 사진을 보고 <이쌔끼 뭐하는쌔끼야>하며 어이없어했다. 그의 용기에 힘입어 내 생일에는 내가 직접 태양이를 불러내서 볼때기에다가 뽀뽀를 해주었고 그것을 증명하는 사진이 아직 우리 집에 남아있다. 당시 엄마아빠는 할머니랑 둘이서만 사는 아이에게 이 아이가 모성애를 느낀 것이 아닌가 하며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나름 추측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아빠가 몰랐던 건 나는 이 아이의 귀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성적인 함의가 많은 귀에 대한 사랑이라, 역시 보행기를 타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성에 눈뜬다는 학설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이다. 이 친구는 정말 원숭이같이 크고 예쁜 귀를 가지고 있었는데 흔히들 어른들이 말하는 복귀였다. 눈은 땡그랗고 몸은 마르고 작은데 다부져서 그야말로 인간 원숭이 같은 날쌘 모습이 참 맘에 들었고 귀는 그중 화룡점정이었다. 한번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그런 모양이 참으로 맘에 들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매년 사랑 콜렉터마냥 꼭 한 명씩을 바꿔가며 좋아하곤 했다. 이때부터는 진실게임이라는 걸 아이들이 하게 되면서 상대의 나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기도 했는데 마냥 좋아함이라는 걸 추측만 하던 유치원과는 달리 "야 쟤가 너 좋아한대~" "ㅇㅇㅇ가 ㅇㅇㅇ 좋아한대~~"라는 대중의 관심 속에서 오고 가는 우리의 감정과 시선은 몹시 짜릿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이제 머리가 제법 큰 녀석들은 어장관리도 하게 되고 (이때만 해도 이런 용어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짓거리가 모두 어장관리였다) 나는 친구의 남자친구를 좋아했는데 그걸 알게 된 그 녀석이 나를 화장실 앞으로 불러서, <자기가 우리 반에서 좋아하는 여자애가 셋 있는데 지금 여자친구는 마음의 50% 정도, 너 (즉 나)는 40% 정도, 그리고 또 다른 여자애가 한 10% 정도다>라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까 이게 무슨 막장인가 싶은데 그때는 그게 너무 좋아서 "내가 40% 라니!!!"라며 길길이 집에서 날뛰었다.


  처음으로 사귀자는 말을 하고 남자랑 사귀었던 건 중학생 때였다. 캠프를 갔다가 만난 한 살 어린 서울애가 맘에 들어서 사귀었다. 스킨십이나 그런 건 하나도 못하고 싸이 쪽지나 대화로만 애정을 속삭였는데 막판에는 일방적으로 그 친구에게 도토리 조공만 받다가 헤어졌다. 사랑은 가끔 이토록 추잡하고 잔인하게 끝난다. 중학교 때부터의 사랑은 거의 다 비슷비슷한 모습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서 괜히 연락하고 찔러보다가 사귀고 스킨십하고 싶어 하고 스킨십하고 결혼 상상하다가 마음이 식고 떠나는 수순이었다.


  대중매체에서 묘사하는 첫사랑의 감정을 처음으로 느낀 사랑은 대학교 2학년때였다. 당시 나는 이미 CC를 한번 한 상태였지만 함께 다니던 남사친이 너무 좋아져서 무려 5장에 달하는 편지로 마음을 고백하고 사귀었다. 편지를 주고 그에 대한 답장이 올 때까지 시간이 너무 안 가서 혼자 자취방에서 영화를 봤는데 그때 본 영화가 노트북이었다. 가슴이 너무 쿵쾅대서 그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아 자꾸만 그 영화를 되돌려보다가 핸드폰에 그 친구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결국 70일 남짓 사귀다가 차였지만 이때 나는 뭐 거의 프로 첫사랑러였다. 친구들한테 "얘를 생각하면 항상 내 마음이 초여름 같아"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친구들은 나한테 학을 뗐다. 입만 벌렸다 하면 첫사랑 타령을 해대니 그 시절 나를 외면하지 않은 친구들은 뭐가 돼도 될 만한 인내심과 인성을 가진 친구들일 것이다. 학교 축제에서 사람 많다고 얘가 나를 끌고 뒤로 가는데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블러처리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별도 첫사랑 같았다. 이 친구 마음이 식은 걸 알지만 얘 주고 싶어서 집에서 목도리 뜨다가 크리스마스 며칠 전 스타벅스에서 만나서 헤어짐 당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렸고 엄마한테 전화로 울면서 나 헤어졌다고 슬프다고 했다. 그리고 한참을 엘지 베스트샵 앞에 쪼그려 앉아서 눈 맞으며 울었다. 한 편의 영화가 따로 없다.


  그리고 그저 그런 놈들 몇 명 더 만나다가 지금 남편과 사랑에 빠졌다. 이 친구에게는 내가 첫사랑인데 남편이 나에게 해준 말들을 생각하면 입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첫사랑이 맞는 것 같다. "널(=나) 만나기 전 까진 세상이 흑백이었는데 이제야 컬러로 보여" "김영하 작가가 말하길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내가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데 소설을 읽는 순간에는 주인공에 이입하게 되는 희열의 순간이 온대~그래서 소설을 읽게 된대~ 나한테는 너(=나)가 소설이야" 이런 말들을 나한테 해주곤 했다. 


  그러고 보면 삶을 시로 만들어주고, 누군가를 시인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 첫사랑인가 싶다. 한 번쯤 시인이 돼서 썼던 시들은 우리 삶의 머리말이 돼서 가끔 이 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울 때 들춰보게 된다. 그 사람도 사람이지만, 때로는 나에게보다 더 큰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풀었던 순간들이 쌓이면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낸다. 내 마음을 거쳐간 나의 수많은 첫사랑들이 있어서 지금 내가 또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고맙다야!



*댓글로 어떤 주제로 다음 글을 쓰면 좋을지 알려주세요!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 

미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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