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첫 작품에 들어가다
나의 첫 그림은 모란화병도였다. 보랏빛 화병에 담긴 흰 모란으로 4주 동안 정성껏 그렸다.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민화의 매력! 이상형이 참 가까이에 있었다.
민화는 그리는 종이에도 사전 작업을 한다. 얇은 종이에 물감을 올리고 여러 번 덧칠하려면 이 얇은 종이에도 힘이 필요하다. 일반 종이를 번짐을 줄이고 그림을 오랫동안 머금고 있을 수 있는 종이로 업그레이드시켜주는 작업을 한다고 보면 된다. 이것을 아교포수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아교와 명만을 섞은 물로 종이를 코팅하는 것이다. 보통의 종이는 물과 친한 성질이며 구멍이 많아서 물감을 떨어뜨렸을 때 확 번져버린다. 민화에서는 이런 효과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전작업을 해야 한다. 이런 부분은 직접 안 그려봤다면 평생 몰랐을 것이다. 이 같은 지혜가 들어가 있어서 민화는 그림 자체가 고급스러운 무드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지혜로운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품위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처럼.
민화는 선 넘는 일이 없다. 민화의 시작은 초 뜨기인데 밑그림을 순지 밑에 두고 고정시킨 뒤에 본을 그리는 것이다. 색을 칠할 때 이 선을 넘는 일이 없다. 반드시 지켜야 할 선. 무례하게 선 넘는 말을 일삼는 몇몇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함께하기만 하면 갉아먹히는 기분이 드는 이 사람들과 반대로 민화는 무례함이 없다. 철저하게 지켜야 할 공간이 있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입체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섬세한 문양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장하지 않는, 담백하게 표현하는 것이 좋다. 모란 화병도를 예로 들자면 꽃잎을 먼저 그린 후 먹을 한 방울 더 떨어뜨려 잎과 줄기를 그린다. 그리고 굵은 붓으로 바위를 진하게 그려낸다. 꽃, 잎, 바위 등 본연의 매력이 잘 나타나도록 선의 농도와 굵기로만 차이를 두는 것이 지나치지 않아서 좋다. 잘 보이고 싶어서 온갖 화려한 말로 자신을 대단한 것처럼 꾸미거나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아첨을 떠는 사람들과 있으면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그림을 그릴 때 내 마음이 편안한 건 담백함 때문이 아닐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