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이유
화실을 다니면서 나만의 루틴이 생겼다면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날 과제를 다 끝내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물감통과 팔레트 등 사용했던 것들을 서늘한 다용도실에 넣어둔다. 온도가 높으면 상할 수 도 있기 때문에 혹시라도 모를 (물감을 사용하지 못할) 슬픈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곤 간결한 식사를 시작한다. 밥은 나의 심심한 삶에서 일종의 파이팅 연료 같은 것이라 늘 소름 끼치게 맛있는 걸 먹어야 했는데 화실을 다녀온 날은 간결함만 가지면 된다.
큰 그림 완성을 위해선 노력도 배가 되어야 했다. 모란부케 모작을 시작했을 때였다. 완벽해 보이지도 않는 본뜨기를 하는데만 다섯 시간이 걸렸고 꽃잎을 한 겹 다 칠해내는 것도 다섯 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꽃잎에 바림을 하는데 여덟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연락하는 것도 최소한으로 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날 붓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시간이 밤 10시 30분이었다. 무려 10시간! 내 인생에서 이토록 내 방에서 몰입한 것이 있었을까 싶은 시간이었다.
뭘 하든 그림 좋아하는 만큼만 하면 되겠구나. 그럼 해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취업을 위해 해야 할 공부 앞에서는 핑계가 많았다. 단순하게 연습하고 반복하는 건 나랑 맞지 않다 생각했다.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몰입하는 걸 원래 잘 못하는 사람이구나 했다. 나이도 있으니까 머리도 20대 때만큼은 아니라서 어쩔 수 없는 거구나. 방에 에어컨이 없으니 여름엔 뭐라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바라던 것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나에게 있었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도와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직장생활은 괜찮았을 텐데.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트라우마 같은 건 없이 보통의 사람들처럼 별 감정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유를 모두 밖에서 찾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분명히 알았다. 내가 포기라는 가장 쉬운 길을 택한 거란 걸. 결국 좋아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