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한없이 자유로워라 하늘까지 닿는 파도를 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이로 헤엄쳐 보아라
- <09:47> 표지 날개에서 부분 발췌
<9:47(글로연), 2021>을 그린 이기훈 작가는 <양철곰>을 통해 2010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 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되었고 2013년 같은 책으로 BIB 어린이 심사위원상을 받았습니다. 이기훈 작가는 글 없이 그림만으로 서사를 전달하는 그림책 위주로 작업을 해왔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은 쉽게 말해 이야기를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전달하는 매체’, ‘이미지와 연출적인 기법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라고이야기합니다. 그는 데이비드 위즈너, 가브리엘 뱅상, 숀탠의 글 없는 그림책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9:47>은 그림책이기에 가능한 독특한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제목 '9시 47분'은 현재의 환경 위기 시각을 의미합니다. 환경 전문가들은 12시가 세계 종말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겉표지의 9시 47분이라는 숫자는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지만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이 표현되어 위기감을 고조시킵니다. 그림책은 가로×세로 30cm로 제법 큰 정사각형의 판형에 총 90쪽으로 생각보다 묵직한 외관입니다. 그림책은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작가의 생각 그대로, 글자는 없지만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도, 갈매기, 사람들의 떠들썩함, 바람 등등 펼쳐지는 모든 면에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정지된 화면이지만 마치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착각도 듭니다. 한 페이지, 한 컷마다 이기훈 작가가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구성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타임슬립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어느 한 페이지부터 이야기는 끝이 아닌 시작으로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은 속지를 넘기자마자 등장하는 통영항 여객터미널 모습의 익숙한 듯 낯선 풍경입니다.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가 영화의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기훈 작가는 <9:47>이 가지고 있는 허구인 상상의 세계를 그럴듯하게 시작합니다. 물론 독자가 처음부터 그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놓았습니다.
매달 한 번 그림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서 이기훈 작가의 <9:47>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회원이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을 막을 수 있을까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간의 종말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국제적인 협약이 이뤄지고 있고 제도화가 된다면 막거나 늦출 수 있다거나 각국의 처한 상황이 다르고 어떤 이유로든 일탈하는 인간이 있어서 힘들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9:47>에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이나 방향성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그 대가를 치를 것이냐, 또는 자각하게 될 것이냐를 다루는 그림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결론을 내야 한다면 그것은 <9:47>를 읽은 독자의 몫일 것입니다. 현실의 자연은 이미 인간에 의해서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며 인간의 삶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자연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자연과 삶을 인위적으로 조작을 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수 자연의 상태로 회귀한다는 것은 현대의 삶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림책에서도 보듯이 인간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한 자연으로의 여행은 환경, 혹은 자연의 문제와 별개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말하는 환경 위기 시각이 현재 9시 47분이라는 것도 어쩌면 자연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 시각은 인간이 인간의 입장에서 멋대로 정한 것이지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림책 안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어마어마한 파괴력은 인간이 정해놓은 시간과의 상관없이 어느 때, 이유 없이 작동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 회복에 대한 믿음이나 희망이라는 것은 자연의 의지와 별개라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울산 반구대에 암각화에서 보았던 고래들이 <9:47>에서 되살아나, 인간이 정해놓은 종말의 시간을 향해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거칠게 움직이는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9:47>을 읽고 "그래서 멸망이야? 회복 가능성이야?"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환경 시계가 9시 47분에 이르렀으며 12시가 되면 인간은 멸망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연말연시의 반짝이는 낭만은 포기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반짝이는 트리를 일부러 찾아가 기념 촬영을 하고 SNS에 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장식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반짝이도록 전기를 사용하는 것과 시즌이 끝나면 철거하여 폐기하면서 발생시킬 수 있는 쓰레기와 탄소 배출량을 생각했다면 크리스마스트리의 화려함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보다 중요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일회용을 자제하기 위해 텀블러를 들고 다니고 재활용품을 철저하게 분리배출하는 것만으로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을까요? 밀집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도시인의 삶 속에서 친환경이나 환경보호는 아는 만큼 실천하기 버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환경 위기 속에 삶이 송두리째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피상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인간은 그 위기마저도 자연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안일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2019년 UN에서 당시 16살이던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저는 여기 위가 아니라, 바다 반대편 학교에 있어야 합니다. 당신들은 빈말로 내 어린 시절과 내 꿈을 앗아갔어요.”라고 외쳤습니다. 이후 4년이 흘렀지만 크게 바뀐 것은 없습니다. 도리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그림책에서처럼 쓰레기 섬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아래는 그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쓰레기 섬이 바다를 점령한 미래에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고 버려지는 수많은 인위적인 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9:47>를 읽고 나면 지금 이 순간도 나의 욕망으로 인해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꿈을 빼앗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기의 삶을 솔직하게 들여다봐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의 욕망이 내가 사는 곳을 어떻게 채워나가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기훈 작가의 <9:47>은 인간의 욕망에 지쳐가고 있는 자연의 상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삶을 주도하고 있는 어른들이 앞으로 이 지구에서 살아갈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남겨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