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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내리면

가을비 : D. H. 로렌스

by 최용훈

가을비

D. H. 로렌스


평평한 나뭇잎이 떨어져

풀잎 위에

검게 젖는다.


구름이 겹겹이 쌓여

하늘에서 몸을 숙여

기울자


비의 씨앗들이 떨어진다.

천국의 씨앗들이

내 얼굴 위로.


떨어지면, 나는 다시 듣는다.

메아리처럼,

숨죽인 천국의 바닥을


조용히 서성이는,

모든 눈물방울들을 짓밟는,

바람의 소리를.


곳간에는

거둬드린 고통의

다발들이


높이 쌓이고,

살해당한 죽은 이들이

겹겹이


천국의 바닥에

부드럽게 흩날린다.

이곳, 우리에게 주어진


보이지 않는

모든 고통의 만나*가

잘게 나뉘어

비처럼 내린다.


* 만나 : 하늘의 양식


Autumn Rain

D.H. Lawrence


The plane leaves

fall black and wet

on the lawn;


the cloud sheaves

in heaven’s fields set

droop and are drawn


in falling seeds of rain;

the seed of heaven

on my face


falling — I hear again

like echoes even

that softly pace


heaven’s muffled floor,

the winds that tread

out all the grain


of tears, the store

harvested

in the sheaves of pain


caught up aloft:

the sheaves of dead

men that are slain


now winnowed soft

on the floor of heaven;

manna invisible


of all the pain

here to us given;

finely divisible

falling as rain.


소설가로 유명한 D. H. 로렌스는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가을비 내리는 오늘, 그의 시 ‘가을비’를 찾아 읽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7년에 쓴 이 시에서 로렌스는 가을의 정취를 전쟁의 참담한 분위기와 대비시킨다. 검게 젖은 낙엽, 떨어지는 빗방울, 모든 것을 지우는 바람, 그리고 죽어간 사람들. 하지만 가을과 전쟁의 처연함은 절망만은 아니었다. 모든 고통이 나뉘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시인은 신과 자연의 섭리를 겸허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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