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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Feb 03. 2022

Andante e Cantabile

습기

 제주살이 고되다는 말은 많지만, 그중 최고를 꼽으라 하면 단연코 습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계절 습기가 촉촉하게 내려앉은 섬이라 겨울엔 가습기 없는 적정함을 유지하지만 요란하게 여름의 시작을 알리면 목을 짓누르는 무거운 습기가 섬을 가득 채우죠. 제주의 습기는 기계를 상하게 하고, 바닥을 습하게 만들어 여름날 방바닥을 맨발로 걷다 보면 어쩐지 그 물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으로 집안을 말려주지 못하면 곰팡이와 동거는 필수입니다.




 제주도 건축이 어렵다는 건 바람이나 많은 강수량, 태풍 등의 이유를 들지만, 사실 이 습기가 집을 상하게 하는 가장 큰 주범으로 습기가 집에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습기를 막는 방법이 쉽다면 고생이랄 것도 없죠. 하지만 막는다 해서 막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습기 돌리는 일에 게으름을 부리면 신발이고 이불이고 옷장의 옷에도 곰팡이가 피어나고 말죠. 사실 제습기도 이 문제를 완벽하게 결하진 못합니다. 제습제고 숯이고. 제주도의 습기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주는 더위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습기를 위해 꼭 들여놓는 가전이 있습니다. 에어컨이죠.




 육지에 살 적, 우리 가족은 에어컨을 자주 사용하지 않기에 제주에 내려오면 에어컨을 들여놓지 말자 했습니다. 환경도 환경이지만 창문 열어 바닷소리 듣고 바람 소리 들으며, 가까운 절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에 귀를 기울여 더위를 이겨내는 것도 시골 생활 정취라고 생각했죠. 서울에서도 1년에 고작 10일도 안 켜는 에어컨을 바닷바람 시원한 제주에서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며 자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판이었다는 것을 제주살이 3년 차에 깨닫고 말았습니다.




 일단 태풍이 불면 집안 창문을 단단하게 압축해야 합니다. 그러니 공기는 갑갑하고, 더위로 막히는 숨은 견뎌내야 합니다. 대체로 육지에서 태풍이 온다 하면 기껏해야 12시간 정도 견뎌내면 될 일이지만, 제주는 최대 이틀을 견뎌내기도 합니다. 올라오면서, 그리고 지나가며, 끝에 꼬리가 모두 벗어나도 후폭풍을 오롯이 견뎌야 태풍이 끝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틀을 꼬박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며 기도하고, 갑갑한 실내에서 숨을 참아내며 인내합니다. 바람구멍 막힌 집안에 무섭게 쌓여가는 습기. 마치 물속에 빠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태풍이 지나면 제주는 거대한 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인 터라 지하로 스며든 물은 지상으로 습기를 올려 보냅니다. 그러니 곶자왈의 식물은 더 깊고 어두운 원시의 빛을 내고, 길가에 뻗은 나무들도 기름 발라놓은 듯 반짝이죠.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말릴 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 많진 않습니다.




 사실 견디려면 견디는 여름. 자연이 준 계절이니 견디지 못할 것 없겠으나, 온몸이 나무로 이루어진 제 지기는 도저히 견뎌내질 못합니다. 그 맑고 고운 소리가 물먹어 먹먹하니 소리를 내지 못하고 축 무너집니다. 피아노와 사는 것이 처음이니 혹시 사기를 맞은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도 드는 겁니다. 그 오해는 다행히 금방 풀렸죠. 제주도 내 이 먹먹한 소리를 내는 건 제 피아노만은 아니었죠. 스튜디오의 피아노도 먹먹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종일 에어컨과 제습기를 연신 돌려놓아도 물먹은 나무는 도저히 기운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평소보다 걱정이 많으십니다.




 소리 안 난다는 게 연습을 회피하는 문제는 될 수 없죠. 저는 수도승이 된 기분으로 이 고난을 견디기로 했습니다. 방의 창문을 닫고 제습기를 돌려놓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제습기를 돌려놓은 4평 남짓한 방은 뜨겁게 달궈져 있습니다. 마치 찜질방을 들어온 기분이죠. 작은 물기도 허용하지 않겠다며 마실 물도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제대로 소리를 나게 하는 습도는 35도에서 40도 사이. 처음 피아노를 구입할 때, 40도에서 60도 사이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하셨지만 45도만 넘어가도 건반의 느낌이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괜찮아지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늘은 미, 내일은 옥타브 위 파 소리가 들려오지 않죠. 드라이기로 말려도 그때뿐입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피아노랑 사는 게 쉽지 않죠?"




 결국 조율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저는 사다리 의자에 앉아 가만히 조율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죠.




 "피아노는 습도도 중요하지만 온도도 중요해요. 또 이 아이가 이 집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하죠."


 "적응이요?"


 "네. 이동하면서 움직였잖아요. 피아노는 그냥 가구가 아니고요. 사용하는 사람의 습관, 집의 형태, 그리고 집의 온도와 습도 외에도 여러 변수를 피아노는 예민하게 알아차리죠. 그러니 두 번 무료로 조율해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아이가 새로운 파트너와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죠.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거든요. 일단, 이 아이는 습도와 온도의 문제입니다. 이 집에는 에어컨이 없으니 습도를 맞춘다 해도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소리가 먹먹해지기도 해요. 그러니 가을이 돼 선선한 바람이 불면 분명 다시금 좋은 소리를 내겠지만, 너무 고생시키진 말아주세요. 이리로 와보실래요? 이런 건 배워두시면 좋습니다."




 하시며 피아노가 소리 내는 구조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왜 습도와 온도가 피아노의 소리를 먹먹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임시방편이지만 그래도 이 피아노가 여름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 노력.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괜스레 피아노에게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피아노를 혹사시킨 기분입니다. 제게 오기 전, 24도 적정 온도에 40도라는 적정 습도 안에서 금이야 옥이야 사랑받던 아이를 데려와 괜한 고생을 시킨 것 같습니다. 배우자의 부모님께 꾸중을 듣는 기분으로 숙연해집니다.




 "아직 여름이 남았으니 걱정이군요. 집에 에어컨이 없으셔서. 제주도 살이에 에어컨은 필수거든요. 제습기로 없애지 못하는 습기를 유일하게 제대로 말려주는 터라."


 "몰랐어요."


 "하하하. 모르실 수도 있죠. 한번 고려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집이 망가지기도 하니까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결국 조율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는 다시금 힘들어했고, 저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계절에 다시금 조율을 부탁드렸습니다. 역시 같은 문제. 그래도 자리를 잘 잡은 듯하다 한시름 놓으셨죠. 다음에는 여름 전에 불러주시면 된다는 당부를 듣고 여름의 끝자락을 보냈습니다.




 가을은 하루 만에 왔습니다. 영영 지나가지 않을 듯했던 여름은 하루 만에 끝이 났죠.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와 피아노 앞에 앉으니 맑고 고운 소리가 다시금 반겨줍니다. 역시 무지한 제가 지독하게 무심했음을 실감합니다. 제 소중한 파트너를 위해 에어컨을 들여야겠다 결심합니다. 그래도 작게나마 바라건대, 자연이라는 또 다른 친구를 위해 여름이 부디 짧게 나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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