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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Feb 21. 2023

불면증이라는 이들을 위하여

합주가 생겼다. 밴드에 들어간 거다. 보컬 리더가 올린 4곡 중 3곡 정도는 카피가 가능하다고 했는데 첫 만남에 3곡을 다 한다고 할 줄은 몰랐다. 넉넉잡아 한곡 카피에 2주가 걸리는 나는 2주 안에 3곡을 카피해야 한다. 곡이 쉽지도 않다. 백예린의 Antifreeze는 베이스 리프 반복 구간이 하나도 없다. 첫마디부터 끝마디까지 다 다르게 해 놨다. 작곡가 누구인지 멱살 좀 잡.. 아, 아니 곡을 정말 훌륭하게 쓰셨습니다!!


어제도 퇴근 후에 두 시간 베이스를 잡았다. 일요일, 월요일 연습에 Antifreeze의 2/3 지점까지 연주가 가능했다. 물론 외워서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한 마디 카피에 한 시간이 걸리던 과거에 비해서는 놀라운 발전이다. 지난 9개월의 걸음마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때의 무수한 실패들이 있었기 때문에 레슨 없이도 혼자 베이스 커버 영상을 보고 카피가 가능해지는 지금이 된 거다. 나도 내가 이 곡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합주의 강제성이 아니었다면, 아마 절대 시도해보지 않았을 곡이다. 지레 겁을 먹고, 너무 어려워, 난 못해!라고 생각했겠지.


알람이 울리고 눈을 뜨는 게 너무 버겁다. 그래도 12시 전에 잠들었는데 왜 이리 피곤하지?라고 생각해 보니 이유는 베이스뿐이다. 귀로 박자를 읽고 눈으로 흐름을 타고 오른손 따로 왼손 따로 잘 짜인 날줄 씨줄처럼 연주를 짜내야 하는데 좌뇌 우뇌가 안 피곤 해 하고 배기겠나. 지난해 처음 베이스를 시작하고 나서 나는 회사 점심시간엔 항상 의자에 좀비처럼 늘어져있었다. 이렇게라도 잠을 자지 않으면 하루를 버티기 힘들었다.


생각해 보니 어젠 자리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냥 눈을 감고 뜬 것뿐인데 아침이 돼버린 기분이다. 베이스를 다시 시작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밤에 잠드는 건 항상 고역이었다. 눈을 감고 올 생각이 없는 잠을 기다리는 건 짝사랑만큼이나 괴로운 일이다.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휴대폰을 들어 SNS검열도 한참 하고 나면 시간은 30-40분 뒤로 훌쩍 넘어가 있다. 그래도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해 잠이 들고 나면 아침은 여지없이 수면 부족으로 고통스럽다. 그런데 어젯밤 잠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이불처럼 덮어 준 모양이다. 역시 제 때 자는 잠만큼 좋은 게 없다. 조금 더 자고 싶긴 했지만 지금 출근길은 머리도 맑고 컨디션도 좋다.


불면증이라는 이들을 위하여. 이 초보 베이시스트는 베이스를 사랑해 보시라고 조심스럽게 처방해 보는 것이다. 근심도 걱정도 슬픔도 우울도, 이 베이스의 단단한 4현 위에 맡겨보시고. 하루 한 시간, 조금 더 여유가 된다면 하루 두 시간씩. 그렇게 시나브로 빠져들다 보면 어느 순간 말하게 될 것입니다. 어라, 불면증이 도대체 뭔데 그래요?



202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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