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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쩌기저비 Nov 28. 2021

더 이상의 타임 아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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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면서 크게 변하는 시기가 있다면 사춘기가 아닐까?


사춘기. 나에게 그것은 한숨과 함께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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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날이다. 아빠 기분이 안 좋아 술에 한껏 취해 온 날. 평소보다 늦은 저녁 ‘삐삐삐삐삑’ 현관 문의 다이얼 소리가 들리면 나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런 날은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다가도 재빨리 내 방으로 튀어 들어가 자는 척을 하는 게 현명하다. 타이밍을 놓쳐 아빠의 레이더망에 걸리기라도 하면 한 시간은 각오해야 한다. 술에 힘을 빌려 거칠 것 없는 헐크의 박력을 얻은 아빠의 잔소리는 그 위력이 대단하다. 유튜브 한 곡 다시 듣기 기능을 사용한 듯한 무한 반복 내용에, 가끔씩 끼어 있는 비속어 단어들은 애교 수준이다. 한참 동안 끊기지 않는 말에 지쳐 백기를 들쯤이면 어느새아빠의 훈화는 이것이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아빠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으로 바뀌어 있고, 곧이어 정적 속에 코 고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특히 내가 뭔가 잘못한 일로 호출을 받은 날은 최악이다. 무릎을 꿇은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아빠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이 모든 과정을 이겨내기란 그리 녹록지 않은 일이다. 그런 날은 ‘네’ 라는 대답 외에는 내 입에서 나올 말이 없어야 할 것을 각오하고 아빠 앞에 선다.



그러나 아빠 앞의 나는 깃발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 중이다. 내 마음의 투덜이와 불평이가 아까부터 나서서 깃발을 펄럭이며 깃대를 흔들고 있다.


‘엄마가 먼저 나한테 화를 냈단 말이야. 나는 뭐 엄마한테 화도 못 내나?’ ‘내가 공부하는 기계야? 지금 공부하기 싫단 말이야. 하기 싫은데 어떡하라구.’ ‘내 인생인데 내 마음대로 못하나. 아빠가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다행인 것은 투덜이와 불평이는 언제나 이성이에게 목덜미를 잡혀 타임아웃 의자(1)에 강제 착석을 당하곤 했다는 것. 타임 아웃이 끝났을 땐 이미 상황 종료. 이런 잔소리 패턴을 수십 회 겪어내며, 나는 자랐다.



그날도 아빠가 어떤 연유로 술을 잔뜩 먹고 집에 와 나를 앉혀놓고 신세한탄을 하던 때였다. 나는 말했다.


“아빠, 이런 말 할 거면 술 먹지 말고 맨 정신으로 해.”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빠는 예상하지 못한 내 말에 잠시 당황한 듯 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잠깐의 정적, 머지않아 아빠는 머뭇거리며 대꾸한다.


“아, 아니 아빠가 취해서 딸한테 이런 말도 못 하냐? 아빠가 얼마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너한테 이렇게 이야기하겠냐. 아빠도 힘들다 힘들어.”


이미 늦었다. 술에 기댄 40대 가장은 사춘기 10대 소녀에게 이길 수 없었다. 이미 승리의 깃발은 내 손에 있었다.


“지금 얘기해도 내일이면 다 까먹고 없었던 일처럼 굴 거면서 이렇게 말해서 뭐해요. 그리고 이렇게 아빠 말 듣는 내 입장은 생각도 안 해? 아빠가 딸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처음으로 아빠에게 대꾸하는 내 목소리는 떨렸다. 촉촉해진 눈가를 들킬까, 그동안 수많은 시간 동안 속으로 되뇌고 시뮬레이션하며 연습했던 말을 어제처럼 다시 삼키게 될까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주먹을 꼭 쥔 손만 응시하며, 내 머릿속에 터질 듯이 울려대던 그 말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연습했던 말을 분명히 입 밖으로 꺼내었다. 이제 나에게 투덜이와 불평이의 타임아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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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가장의 위기를 느끼고 달려온 엄마의 개입으로 이 일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그 후로 아빠는 전과 같이 나를 대하지 못했다. 본인의 생각보다 훌쩍 커버린 딸의 모습을 그제야 직시했으리라.


아빠의 한없이 작고 연약한 어린 딸은 변했다. 아빠의 말이면 모두 옳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말을 따랐던 딸은 이제는 아빠의 나약함(술 먹고 우는 어른은 갓난아이보다 나약하다.), 모순(나에게는 몸에 안 좋다 콜라를 먹지 말라며 본인께서는 500 미리리터 한 캔으로 술을 마무리한 적이 있었는가.), 때로는 비겁함(나이와 어른은 무기로 일단 예의, 말대답 금지를 요구하는 어른이란. 그러는 어른들은 그동안 아이들에게 얼마나 예의를 지켰는지.) 까지도 아는 존재가 되었다. 아빠도 나와 같은 오류 투성이에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일 뿐이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춘기. 그것은 부모를 처음 넘어서는 것부터 시작이 아닌가 싶다. 엄마 아빠를 나의 보호자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등한 위치라고 생각하는 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깨닫겠지.


‘아빠 엄마가 언제 이렇게 작아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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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뒤면 우리 아이들은 11 12살이 된다. 거실에서 색종이로 비행기를 접어 날리며 ‘ 아직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에요.’  몸소 보여주는 녀석들을 보며 안도감을 느낀다. 아직 어린아이로  곁에 남아있는 아이들이 감사하다. 그러나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도 어느 순간 문득 두려워진다.  놈들이 나를 보며 한숨을 쉬는  순간이 머지않았음을, 40대를 마주한 아줌마의 직감이 말해준다.



며칠 전 첫째 아이가 나에게 크게 혼이 났다. 아이는 평일에 핸드폰 게임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몰래 게임을 한 데다 그 사실을 숨기려 거짓말까지 했다. 나는 아이의 잘못에 모진 말을 쏟으며 언성을 높였다. 이런 내 모습을 마주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울 것 같은 표정의 첫째 아이를 보면서 25년 전의 나를 본다.



이 녀석, 지금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을까?


“엄마, 지금 내 나이에 주말 2시간 게임 시간이 말이나 돼요? 내 친구들은 자기 게임시간은 자기가 알아서 정한다구요. 왜 저는 엄마가 정한 게임 시간에 맞춰서 게임해야 돼요? 저도 제가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다구요. 엄마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거짓말하게 되는 건 제 잘못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오죽하면 이랬을 거라 생각 안 해봤어요? 게임하면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어요. 저도 평일에 게임하고 싶단 말이에요!”


25년 전 아빠 말에 대꾸하던 나처럼 엄마의 말에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아이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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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될 준비를 마친 아이를 만나는 그날.


그날이 오면,

나도 25년 전 아빠의 기분을 알 수 있겠지.





(1) 타임아웃 의자 : 육아에서 사용하는 훈육 방법 중 하나. 아이가 격해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순간에 정해진 공간에 아이를 격리시켜 감정 조절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방법이다. 주로 격리되는 방구석의 공간에 의자가 놓여 있고, 아이는 타임아웃의 시간 동안 그 의자에 앉아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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