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00일이라네요
드디어 카운트다운이다!
전국의 모든 성당과 교회, 사찰, 그리고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바로 그 대목의 시간, 그날이 진짜로 왔다.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고3이 된 지 엊그제 같은데, 아직 더워도 너무 더운 8월인데... 이 폭염의 한가운데에서 맞이한 D-100일,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는다.
내가 다니는 성당에서도 '수능기도모임'이 열렸다. D-100일을 그나마라도 실감하는 건 성당에서 기도를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도모임'에 온 분들과 함께 신부님이 선물로 주신 묵주알을 하나하나 끼워가며 묵주를 만들었다. 100일 동안 기도한 이 묵주를 수능날 아이의 팔목에 채우겠지. 엄마의 정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물질화시킨다는 의미랄까. 뭔가 아이에게 마음의 안정을 줄 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엄마들은 노안의 침침한 눈을 열심히 찡그려가며 한 알 한 알 열심히 묵주알을 꿰었다.
매년 입시가 나름대로의 이유로 힘들다지만 이번에 입시를 치르는 현역 고사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불리한 조건에 서게 되는 것 같다. 언론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흉흉하다. 작년에 지방 의대 입시에 성공한 학생들이 일 년째 휴학하는 바람에 다시 N수생이 되었다 하고, 요즘 서울소재 대학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책이 '수능완성'이라는 도서관 괴담까지 들린다. 그것뿐인가. 서울소재 대학의 95%가 N수생이라는 퍽 괴팍한 괴담까지 가히 점입가경이다.
그러니 보편적인 대입합격의 간절함은 차치하고라도, 이 소용돌이에서 어떻게든 무사히 살아남고 싶은 마음뿐이다. 모두 같은 마음이겠지.
그렇지만 사실 정작 나는 말이다. 청개구리 기질이 강해서인지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유난 떠는 이런 분위기가 그리 달갑지는 않다. 평소에 성당에서 보이지 않던 부모들이 아이의 미래가 온통 이 기도에 달린 듯 갑자기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도 그다지 예쁘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있다고 했던가. 조용히 기도하러 나간 자리에서 평소 얼굴만 알던, 마주치기 싫은 사람들을 마주치고야 말았다. 일명 '쎈 엄마'라 일컬어지던 그녀. 아이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등교시간마저 바꾸었다는 전설의 전교 1등 엄마가 기도하러 간 그곳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엄마가 몇몇의 엄마들과 함께 기도모임에 앉아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 내 마음속이 진흙탕이 되고 분심의 도가니가 되었다. 차분하게 기도하러 간 자리였는데. (음…그런데 이거 혹시 공부 잘하는 딸을 둔 그녀에 대한 반감이 불러낸 나의 시샘인가?)
순간, 자칫 아이의 경쟁이 부모의 경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이 기도모임에서 나는 어쩌면 도를 닦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긴, 들었다.
수능. 이 시험을 끝으로 이제 아이의 학창 시절이 마무리된다. 사실 아이의 성적에 대해 간절하게 기도하던 때가 나도 있기는 있었다. 아이가 사춘기를 시작하기 직전, 중1 때. 첫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는데, 나도 엄마는 처음이었던지라 학원에서 주는 성급한 불안들을 꿀꺽꿀꺽 받아먹고 아이에게 나의 불안을 울컥울컥 토해냈더랬다. 그때를 놓치면 입시에서 완전히 뒤처진다는 공갈과 협박에 넘어가 아이를 다그치고, 그 엄청난 선행진도와 학원수업을 보내면서도 한 과목도 놓치지 않게, 잘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었던 것 같다. 물론 결과는 나를 배신했고. 우리의 모녀관계 또한 파투가 났지만 말이다.
그렇다 보니 내가 요즘 기도하는 것은 '아이가 수능대박이 나서 좋은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일 수가 없다. 인생을 살아보니, 이제 겨우 스무 살 대입 결과가 인생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겠기 때문이기도 하고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성적이 오르는 것 또한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입성공, 그게 진짜 인생의 성공은 아니지 않나. 대학입시는 마치 가까이서 보면 엄청난 등락을 반복하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주식차트의 그래프처럼 그냥 지나가는 순간이자 과정이자 시간일 뿐이다.
그나저나 나의 느긋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너나없이 열심한 수험생들의 대열에 발맞추어 우리 고사미도 올여름 이 혹서기에 수능문제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런 딸을 보며 내가 다짐하는 것이 '간절해지지 말자'라는 것이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마음이 옳다고 생각한다. 간절함이 우주를 감동시킨다는 말, 여러 차례 많은 책에서 보아왔지만, 아이의 성적을 두고 비는 부모의 간절함은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간절함은 기대를 낳고, 기대는 아이에게 독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우리 딸이 이 긴 레이스를 마칠 때까지 멀리서 제삼자처럼 지켜보려고 한다. 마치 인생 12회 차 엄마처럼, 아니 고3이 된 열두 번째 막내딸을 둔 엄마처럼 말이다. 그런 애정 어린 시선으로 우리 고사미를 지켜봐 준다면 힘이 나지 않을까? 그저 식사 안 거르고, 학교 안 빠지는 그 모든 것에 기특해하면서.
며칠 전이었던가, 갑자기 내 옆에 앉아 도란도란 떠들던 고사미에게 나의 갱년기의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요즘 가끔 엄마의 가슴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다고 했더니 나름의 솔루션을 주는 거다. 엄마의 증상이 갱년기 초기 증상인 것 같다며 재미있는 영화를 추천해주기도 하고, 제 딴에는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기도 하는 등.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야기를 마칠 때쯤 큰 위로를 받은 느낌이라 "너 T라며, 아닌데? 되게 공감 잘해주는데?"라고 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엄마 한정 F야."
아… 이리도 가슴 따뜻하고 설레는 고백을 받아본 사람이 있을까.
그래, 이 정도면 우리 고사미는 D-100일을 건강하게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까짓 D-100일이 별거냐, 큰 일인 양 유난 떨지 말고, 이것저것 드는 분심에 지지 말고 그냥 내 아이를 믿고 기도해 주자. 그것이 내가 수능 100일을 맞이하는 아주 아주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엄마 한정 F인 우리 딸! 고마워!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