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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와 천재는 종이 한 장 차이?

내 아이가 영재라고 착각한 순간들

by 레이첼쌤

아이가 숫자를 읽기 시작한 건 두 돌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외출하려고 현관문을 나서면 엘리베이터에 보이는 빨간색깔의 그 숫자를 굉장히 좋아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가 숫자를 하나 하나 읽어주면 곧잘 따라 말했다.


한글도 마찬가지였다.

두 살 때쯤 아이의 이름을 스케치북에 써주고 정확하게 발음하며 읽어주니 글자를 알고 따라 읽는듯 했다.

나와 남편은 환호하면서 "애가 글자를 읽어!"라고 했던 것 같다.


곧 알파벳도 그런식으로 익혔다.

내가 굳이 문자를 노출하려고 신경쓰지 않아도 뽀로로 장난감에서부터 온갖 교구와 장난감은 신기하리만치 한글, 알파벳, 숫자가 함께 쓰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부모가 원하는 학습도 될 수 있다는 듯이.

바퀴 달린 자동차와 숫자나 문자가 나온 뽀로로 전화기같은 장난감을 가장 좋아했다.

그것들만 있으면 내가 굳이 옆에서 놀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곧잘 노는 것 같았다.


임신해서 이사를 와 친정, 시댁도 없고 육아 메이트를 할만한 친구도 딱히 없던 독박육아 시절이었다.

남편은 일하느라 바빠 함께해주지 못하는 시간들을 각종 장난감과 좋아 보이는 교구, 값비싼 육아용품들로 채워주려고 노력했다.

나는 저질 체력과 외로움으로 항상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와중에도 열심히 문화센터를 쫒아다니며 나와 어느 정도 나이대도 맞고, 대화도 통하고, 편하게 어울릴만한 육아 동지들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이의 문자 집착이 그 때부터 조금씩 드러났던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 중 하나는, 짐보리 수업에 갔을 때였다.

짐보리는 깨끗하고 안전한 유아용 실내 놀이 시설이 갖춰진 상태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선생님이 여러 가지 신체 놀이와 감각 놀이를 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외국에서 들어온 뭔가 고급스러운 느낌의 놀이수업이다. 수업료도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투자 가치가 있는 교육 비용이라고 생각했고, 아이와 하루 종일 둘이 있으면 도무지 가지 않는 시간 떼우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네다섯명의 비슷한 개월수 아이들과 수업에 참여했는데, 내 아이는 도통 수업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봤을 때 선생님의 유아를 다루는 노하우와 스킬은 대단했다.

목소리도 높은 솔톤이고, 아이 한 명, 한 명과 눈 마주치며 상호작용하고, 끊임없이 관심거리와 놀거리를 제공하며 색깔 구분, 신체 인지 등을 언어와 연결시켜주는 활동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다 신나서 선생님을 따라다니고, 웃고, 즐거워했는데 내 아이는 유독 자꾸 문 밖으로 뛰쳐 나가려고만 했다.

이유는 단 하나.

교실 밖에 있는 교구함의 멜리사앤더그 알파벳 사운드퍼즐을 갖고 놀기 위해서다.

한 시간 수업 동안 삼십분은 족히 나와서 알파벳만 주구장창 가지고 놀았다.

온갖 설득과 노력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면 또 뛰쳐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그 때 나는 참 멍청하게도, 아이가 똑똑해서 알파벳을 좋아하니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 살 때, 아이 인생 처음으로 어린이집이라는 교육 기관에 입성하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든 아이를 어린이집에 잘 적응시키고 싶었다.

2년간 거의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나와 한 몸으로 붙어 있었으니 하루에 단 두시간만이라도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생각을 하니 설레였다.

운동도 좀 하고, 복직을 위해 공부도 좀 하고, 가끔 브런치도 먹고..

보통 세 살 아이들은 엄마와 쉽게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같이 입학한 아이들 모두 얼마간의 적응 시간은 걸렸다. 하지만 시간이 차츰 지나고 3월 한 달이 다 지나가면서 거의 다 적응해갈 때, 내 아이만 유독 어린이집을 온 몸으로 거부했다.

나는 그런 아이가 가여워서 꽤 오랫동안 오전 반나절만 맡기고 점심 때 데리러 갔다.

아이가 다니기 시작한 어린이집은 아파트 관리동에 위치해서 아주 가까웠고, 그 전에 보냈던 엄마들이 괜찮다고 인정한, 평판이 괜찮은 곳이었다. 그만큼 들어오고자하는 대기도 항상 있었다. 원장님도, 아이의 담임선생님도 믿을만한 분들이었다.

유난히도 내 아이만 3월에 찬 바람 불 때 시작한 어린이집 적응이 반팔티 옷차림을 입기 시작한 5월이 되어서까지도 이어졌던 기억이 난다.

아침마다 어린이집으로 향하면 아이는 울면서 내 머리를 쥐뜯다가 어린이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겨우 달래서 문 앞까지 도착하면 선생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우는 아이를 안고 나에게 얼른 가라고 손짓하면 도망치듯 나왔다.

그 와중에 원장선생님은 우리 아이를 안정시키는 방법을 찾으신듯 했다.

바로 어린이집에 있는 전자시계나 달력을 보면서 신나는 리듬으로 숫자를 크게 읽어주시는거다.

그러면 아이는 신기하게도 조금 진정이 되었다.

어느 날은 목이 터져라 아이를 안고 십의자리, 백의 자리까지 숫자를 읊어주시는 원장님을 보았다.


그런 아이를 보고 다른 엄마는 "아이 혹시 천재 아니에요? 벌써 숫자를 다 알아." 했는데, 나는 애써 반박하며 속으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지나친 시각 추구로 인한 문자 집착일 뿐이었다.

아이는 청각적 주의력이 약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은 잘 듣지 않지만, 시각적 자극에 매우 취약해서 일정한 형태를 가진 숫자나 문자가 굉장히 매력적인 먹잇감이였던 것 뿐이다.

관심이 많이 가기 때문에 그것을 좀 빨리 인식하고 인지한 것일뿐,

아이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들 숫자나 한글은 떼게 되어있다.

그걸 일찍 뗐다고 해서 언어능력이 더 뛰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유아 시기에는 글자는 못 읽어도,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고, 자기 표현을 정확히 하고, 엄마와 상호작용을 잘 하는 아이가 더 언어능력이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초보엄마인 나는 전혀 몰랐다.

아이가 세 살인데 아직 아이가 제대로 말이 터지지 않아 걱정이라고 주변에 하소연하면,

엄마들이 "숫자도 알고 글자도 읽는데 언젠가 문장으로 바로 말하겠죠"하는 말에 위안을 삼기까지 했다.



3살에는 영어로 원,투, 쓰리, 포 하면서 백까지도 읽었다. 영어유치원에 보내리라는 욕심이 있었던 나는 신나서 더 정확한 발음으로 읽어주고 아이가 따라 읽도록 했다. 뿌듯한 마음에 영상으로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했다.

4살에는 양치기소년같은 동화책은 술술 읽었다. 그것도 감정을 실어서 실감나게.

그런 모습들을 영상으로 찍어서 시어머니께 보내드리면 시어머니는 어디서 이런 천재가 나왔냐며 흐뭇해하셨고, 그 영상을 또 큰 손주에게 보여주면서 4살 동생은 이렇게 글도 잘 읽는다고 너도 6살이니 얼른 한글을 떼어야 한다고 자극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지 못할 일들이지만, 집안에 자폐나 발달지연과 같은 분야를 알거나 겪어본 사람이 없으니 그런 아이의 모습이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걸 감지하지 못한것이다.



독서를 즐겨하시고, 학생 상담과 관리에도 능숙하셔서 배울게 많았던 옆자리 선생님과 발달장애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 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자폐와 천재는 종이 한 장 차이잖아요. 자폐인 아이들도 한 가지 영역에 굉장히 몰입하니까 뛰어나고 아는 지식은 많을 수는 있지만 소통이 안되니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지 못하잖아요. 천재는 자기가 아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고, 무언가 발명을 하든지 해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자폐는 그럴수가 없으니까요."


내 아이도 혼자 그냥 아는 것만 많고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걸까.

그렇게 혼자 평생을 외롭게 살아가게 되는걸까.

그 선생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무겁게 들어앉아 한참을 멍하니 생각했고, 한동안 우울함에 시달렸다.


웃긴건 그 때 아이는 5살이었고,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지도 않았는데 아이의 독특한 행동양상을 보고 나 혼자 단정짓고 괴로워했다는 사실이다. 첫 검사에서는 아직 어려 운 좋게 진단이 나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증상이 더욱 도드라져 결국 진단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지금 만약 두 세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아이가 숫자나 문자에 관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면 나는 도시락을 싸서 쫓아다니며 못 읽게 하라고 말리고 싶다. 집에 문자가 나온 모든 장난감과 교구, 심지어 동화책까지도 다 없애버리라고. 아이는 점점 그것에 빠져들어서 발달에 문제가 올 수도 있다고.

실제로 소아정신의학계에서 유명하신 신모 교수님은 (내가 직접 진료 받아본 적은 없지만), 조금 심각한 경우에 집에 있는 모든 책을 일단 다 숨기거나 갖다 버리라는 조언을 하신다고 들었다. 아이가 시각적 자극에 더 집착하기 전에 아예 그 집착의 대상을 제공하지 말라는 취지인 것 같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방송 프로그램이 한창 최정상을 달리는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 출연했던 삼둥이의 집에 장난감이 단 한개도 없었던 모습이 문득 생각난다. 삼둥이 엄마는 판사를 지낸 법조인이라고 하던데, 역시 배운 사람들은 아동 발달에 있어서 장난감 따위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걸 다 알고 그랬던걸까. 나도 아이를 낳기 전에 공부 좀 할걸.


7살이 된 아이가 한글을 못 읽어서 걱정인 엄마에게 나는 저렇게 말도 잘하고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는데, 걱정도 하지 말라고 언젠가 다 읽는다고, 그리고 핀란드에서는 초등 입학전까지 문자 교육은 절대 시키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요즘은 그러면 안된다고 주변 엄마들의 빈축을 산 적이 있다.

내 입장에서는 한글을 다 알아도 사람들과 소통이 제대로 안되는 내 아이가 참 답답하고 그 아이가 너무 부러운 마음에 해준 말인데, 정상발달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마음은 또 그게 아닌거다. 당장 또래 아이들이 한글을 떠듬떠듬 읽기 시작하면 조바심이 나는게 보통 엄마들 마음인데 말이다.


두세살부터 아이가 한글을 읽어서 영재라고 착각했다가, 큰 코 다친 내 뼈아픈 경험에서 나온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제 자식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자식 교육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내 교육철학을 늘어놓다니, 나도 참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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