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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엄친아를 낳을 줄 알았다

현실은 ADHD

by 레이첼쌤


아들과 같은 태권도장에 다니는 남자아이가 있다. 우리 아이가 같은 태권도장에 다닌지도 꽤 됐고 운동신경이 좋아서 피구 할 때에도 늘 형들 팀에 끼어서 하는 아이라고 했다.

그 친구가 하루는 여자 친구들이 주로 많이 노는 놀이터에 처음 왔는데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초1 여자아이들이 "너 핸드폰 있어? 번호 뭐야?" 하면서 서로 앞다투어 둘러싸고 그 남자애랑 한마디라도 더 해보려고 하는 분위기였다고 건너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우리 아들이 같은 놀이터에 갔을 때는 여자 아이들에게서 전혀 그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그 사이에 껴서 좀 놀아보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좀 겉돌거나 하다 오는 게 다였다. 매사에 자신감 없고 소심한 행동을 하는 아이이니 또래 아이들에게 환영받는 성격 자체가 못된다.

그런데 같은 여자 친구들이 그 남자 친구에게는 이토록 다른 반응을 보이다니.

우리 애가 그렇게 별로인가?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제일 예쁘다고, 사회성이 없어서 그렇지 내 눈에는 내 아들이 가장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나름 호감 가는 인상이고 키도 큰 편인데 그 남자아이보다 대체 뭐가 부족한 걸까 혼자 생각해봤다.

그 애는 일단 키가 크고 8살임에도 불구하고 몸에서 탄탄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운동을 잘한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는 더 인기가 많은 것 같은데 여자 친구들 뿐만 아니라 남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학습도 잘하는 편이고, 친구가 어려운 상황이면 도와주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장난을 치거나 공격적인 말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같은 반 친구 엄마에게 건네 들었다.

​8살 여자아이들도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고 키 크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나 보다. 매력적인 아이는 어딜 가나 눈에 띄고 주목을 받는 게 당연하듯이.

내 아이는 운동을 못해서인지, 아니면 사회성이 부족해서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성격이 못되어서 그런 건지.

이번에 친구에게 편지 쓰기 행사에서 아들은 아무에게도 편지를 못 받았다고 한다. 선생님은 편지를 못 받은 사람도 실망할 일이 아니니 속상해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셨다며 아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많이 신경 쓰이고 속상하다.

신체 청결 상태도 항상 신경 쓰고, 등교 준비하면서 옷도 최대한 깔끔하게 입혀 보내고, 선생님 말씀으로는 수업시간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편이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남자 친구 아닌가?

내 아들은 여자애들에게 인기 엄청 많아서 편지도 받고 고백도 받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아이 아빠는 자기 말로는 초등학교 때 인기 엄청 많았고 인기투표하면 항상 1위였다고 주장하는데 왜 아들은 그건 안 닮았은 건지 궁금할 뿐이다.

어느 날은 놀이터에 있는데 여자아이들끼리만 서너 명이 같이 놀면서 또 그 남자아이 이야기하는걸 우연히 들었다. 놀이터에는 그 남자애가 있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그 친구랑 전화 통화해봤다는 둥 전화했는데 받지 않아서 실망했다느니 너는 내가 걔랑 친해지는 게 싫으냐는 둥 그 남자아이를 두고 자기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듯한 대화 내용이었다.

세상에. 초1 여자아이들도 인기남을 두고 서로 질투하고 경쟁의식도 느끼는구나.

내 아들도 그런 인기 남이라면 좋으련만.

​나는 당연히 내가 엄친아를 낳을 거라고 생각했다.

뱃속에 아이의 성별이 남자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남편과 나의 외모 중에서도 장점만 쏙 빼닮은 아기가 태어날 거라고 생각했고, 연예인이 될 만큼의 절세 미남은 아니어도(부모가 수려한 외모가 아니기에) 소개팅에 나가면 적어도 외모로 퇴짜 맞지 않는, 훈남 정도는 될 거라고 확신했다.

어릴 적부터 영재 소리 들었다는 아빠를 닮아 머리는 당연히 똑똑할 거고 혹시나 조금 덜 똑똑한 나를 닮을까 봐 임신 기간 내내 내 전공 관련 공부를 손에 놓지 않았다. 다른 태교보다 엄마가 책을 읽고, 공부하면 뱃속에 아이도 함께할 거라는 생각에.

아이가 어렸을 때 나는 각종 영어 CD와 원서를 사제 끼면서 들려주고 같이 영어 동요를 노래 부르고, 당연히 영어유치원에 갈 거라고 생각했고, 우리 지역에서 평판 좋은 영어유치원은 어디인지 심심하면 맘 카페 후기를 찾아보곤 했다. 영유를 나와, 학비를 따로 내야 하는 교복 입는 사립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다양한 종류의 사교육을 받고도 모두 무리 없이 소화하며, 초등학교 3,4학년쯤 되면 1년 정도 미국에 어학연수도 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춘기 중, 고등학교 이후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초등 때까지는 적어도 이렇게 크게 될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당연히 인 서울에 명문대학교를 가고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갖는 큰 그림을 어렴풋이 그렸던 것 같기도 하고.

인성면에서도 착하고, 예의 바르고, 성실하고, 학업에 열의를 보이고, 호기심 많고, 다정하고, 친절한 건 당연하고 리더십까지 갖춘 훌륭한 어린이로 자랄 거라고 믿었다.

물론 이렇게 완벽한 남자아이가 주변에 있다면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당연하겠다. 이런 친구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 아이들이 있으랴.

지금 내 아이와 나의 처지를 생각하면 참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그때의 철없던 나는 그렇게 믿었다.

아이의 현실은 ADHD로 주의력이 부족해 약을 복용하고, 스스로 친구관계를 형성할 만한 사회성을 갖추지도 못했고, 언어발달지연으로 인해 자기표현도 서툴고, 약 부작용으로 식욕부진과 수면장애를 겪고 있다. 아이의 부정적인 면만 나열하니 끝도 없지만 장점도 많고 때로 나에게만은 자랑스러운 아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제발 또래와 같은 발달 수준에만 올라와줘도 감사하기 그지없을 것 같다. 평균 또래 발달의 그 근처 언저리만이라도 살포시 발을 얹어보게 하는 게 내 간절한 소망이고 아이에 대한 장기적인 목표이다.

친정엄마는 십수 년 자리 잡고 살고 있는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년배 지인들이 많은데, 60대쯤 되면 다른 거 잘난 건 다 필요 없고 자식 잘 된 사람이 가장 부러움을 산다고 한다. 장기간의 수험생활에도 공무원 시험에 낙방하거나, 취업 기회조차 얻지 못해 힘들어하는 주변분들의 자식들에 비하면 엄마는 자식 농사에서 최상위까지는 아니어도 평타 이상은 된다고 여기시고 그로 인한 자부심도 은근히 느껴진다.

나 역시 자녀를 낳아 키우고 보니 나 자신을 위해 바라던 어떤 원대한 꿈과 목표보다 아이가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게 큰 바람이고 인생의 과제가 되었다.

지금은 우선 온전히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닌 어린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 아들이 30살쯤 되었을 때 이런 삶을 살고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건강한 몸과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청년이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고 적극적이어서 호감을 주는 성격을 가졌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본인 집에서 산다.

​훌륭한 인성에, 지적인 매력을 더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연애도 여러 번 해보았고, 현재 여자 친구가 있다. 전공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고, 자기만의 취미 생활을 즐기며 여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낸다.

다른 나라에 1년 이상 유학을 한 경험이 있고, 그 경험으로 열린 사고와 넓은 시각을 지니고 있고 언제든 다른 나라에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무언가에 계속 도전하고 성취하려는 욕구가 늘 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항상 낙관적이고 더 큰 꿈을 꾸는 상상력을 가졌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패션 센스가 있고 취향이 분명해서 옷을 잘 입고 자신을 꾸밀 줄 아는 사람이라 누구든지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한다.>

30살 남자의 모습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이 있을까.

쓰다 보니 훈남의 조건은 모두 다 갖췄고, 소위 말하는 엄친아의 모습 같다.

내 아이도 엄친아로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 아이를 엄친아로 키우고 싶다.

지금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헛된 꿈이나 꾸고 있는 현실감 잃은 못난 엄마라고 비난받아도 좋다.

내 아이의 미래를 두고 엄마인 내가 희망을 품지 않으면 그 누가 대신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지금은 조금 어렵고 힘든 점도 있지만 결국 이겨내고 극복하고 자기 자신의 약점을 이해하며, 극복하고

잘 자라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그 탄탄한 믿음을 바탕으로 아이를 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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