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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Sep 26. 2023

충격적인 초2 글쓰기 실력

ADHD 아이 잘 키워보기

학교에 다녀오면 나는 먼저 아이의 가방부터 확인한다. 매일 수업시간에 한 활동지, 학습지, 만들기 결과물, 낙서 종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느 날은 가지런히 접힌 편지 봉투가 나왔다. 우편집배원에게 쓴 편지였다. 저번 학교 숙제가 동네 직업인 인터뷰였는데 그와 연관된 활동이려니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 세상에 쿠팡맨을 더 많이 봤으면 봤지, 우편집배원 아저씨는 볼 일이 거의 없는데 아이는 어떤 내용을 썼을지 사뭇 궁금해졌다. 우체국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만 들어봤지 경험해 본 적은 없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편지지를 펼쳐보니 뭔가 빽빽하고 길게 쓴 느낌이다. 읽다 보니, 한숨이 나온다. 이게 뭐야.. 너무 못 썼잖아.

너무 실망스러웠다. 처음 본인을 소개한 한 문장을 빼고는 나머지 거의 모든 문장이 비문이었다. 비문법적인 문장 말이다.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우체부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해주셔서 고마워서입니다. 라든지 고맙기 때문입니다.라고 써야 한다.




저희도 상대에게 우편을 보낼 때 상대에게 우편을 보내줘서 고맙습니다.


이 문장은 너무 똑같은 어구가 반복되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상대에게 우편을 보낼 때 상대에게 우편을 보내줘서라니? 이게 대체 뭔 말이야?




그리고 저희한테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발견한 가장 충격적인 문장이다. 그리고 저희한테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라는 문장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뭐 우체부 아저씨 덕분에 새로운 소식을 받아보게 되었다, 대충 이런 요지를 가지고 쓴 문장 같은데 전. 혀. 말이 맞지를 않다.


나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애가 글을 왜 이렇게 못 쓰지? 어쩌지? 당장 독서 논술 학원에 등록해야 하나? 책육아 한답시고 나름 학원 스케줄을 최소화하고 도서관에 자주 데리고 다니면서 노력하고 있다. 언어 발달 지연이 있었기에 말은 터졌어도 뭔가 화용적인 면에서 부족한 면이 눈에 띄고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도 가끔 있다. 센터 수업을 늘려서 아이에게 부담을 주기보다, 좋아하는 종류의 책에 많이 노출시키고 읽히면서 느린 언어발달을 따라잡고자 했다.


다행히 제 학년의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은 큰 어려움 없이 따라가는 것 같았다. 숙제로 내는 일기에 쓴 글도 백 퍼센트 만족스럽진 않지만 아주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었다. 일기장에도 이렇게까지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을 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우체부 아저씨께 쓴 편지에도 이렇게까지 비문이 난무하는 글을 쓰게 됐단 말인가.


아이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이 편지글을 보여줬지만 나는 표정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가족들에게 아이의 글을 보여주었다. 남편은 뭐 남의 일인 양 점점 나아지겠지라며 놔두라고 했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조카들을 키우는 언니네는 당장 논술학원에 등록시키거나 아니면 수준에 맞는 글쓰기 교재를 사서 꾸준히 시키라고 조언했다. 책을 너무  안 읽어서 그런 거니까 일단 책부터 좀 읽히라고 했다. 아니라고, 매일 꾸준히 두세 권씩은 읽히고 있다고 대답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오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내 마음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친한 센터 엄마는 그래도 아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의도는 알 것 같으니 너무 못한 건 아니라고 해주었다. 큰 위로는 되지 않았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다음 달부터 하는 동네 복지센터 논술수업에 등록해 두었는데, 기왕이면 돈 주고 소수 정예로 하는 그런 논술 교실에 보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됐다.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 수업을 오신 날이었다. 짧은 수업을 끝내고 그날도 피드백을 해주셨다. 늘 아이가 똑똑하고 잘한다며 칭찬 일색이시다. "방문 학습지 수업이 다 그렇지 뭐. 다른 애들도 칭찬만 해주시겠지." 생각하며 영혼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나서 이 편지지를 보여주었다. 한 번 봐보시라고, 학습지 문제는 웬만큼 푸는데 글쓰기가 영 엉망이라고. 학습지 선생님은 또래 아이들 많이 지도하시니까 뭔가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 이 정도면 너무 잘 썼는데요..?! 우체부 아저씨가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고, 고마운 마음도 전해지네요. 조금 틀린 문장이 있긴 한데 이런 거 다른 초2 애들도 틀리는 애들 많아요. 내가 봤을 때는 진짜 잘 썼어요. 칭찬해 주셔야죠.."


"... 정말 그런가요?"


선생님의 반응이 믿기지 않아 틀린 문장을 짚어가며 다시 한번 봐보시라고 했다.


"어머니가 기대치가 너무 높으신 것 같아요. 이 정도는 틀릴 수 있죠. 그리고 열심히 쓰려고 노력한 티가 나잖아요. 이렇게 길게 쓰는 것도 보통 애들은 힘들어해요. 잘했다고 칭찬해 주세요. 틀린 문장도 많이 써보고 하면서 천천히 느는 거죠. 정확하게 고쳐주려고 하지 마시고요."


"어머니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요리했는데, 짜다, 달다, 간이 안 맞다 하면서 가족들이 막 토 달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애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쓴 글인데 여기가 틀렸다, 고쳐봐라, 잘못됐다 하면 기분 안 좋아서 다음번부터는 더 쓰기 싫은 마음만 들걸요. 틀려도 좋으니 열심히 써보는 경험이 더 중요하죠."


할 말이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았다. 아이는 나름대로 예쁜 글씨체로 우체부 아저씨가 하는 일의 역할을 생각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다. 문법적으로 많이 틀리긴 했지만 그건 뭐 더 많은 글을 접해보고 더 써보면서 차차 나아질 수 있다. 게다가 언어 발달 지연 소견까지 받은 아이인데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내가 너무 높은 기준을 세워두고 바라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편지글을 다시 읽어보니 아이의 노력이 눈에 들어온다. 연필을 들고 한 자 한 자 집중해서 쓰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새삼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아이한테 틀린 문장을 깨닫게 해 주려고 다시 한번 읽어보라고 시킨 게 좀 미안하다. 읽으면서도 자기가 어디가 틀렸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거 같아서 나는 더 절망했다.


하루아침에 글쓰기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고, 당장 논술 교실에 등록한다고 하루아침에 뭐가 달라지겠어.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무언가를 써보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에 의미를 두자.


그런데 어제 또 학습지 문제를 풀다가 아이가 쓴 글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엄마, 존경이란 말이 무슨 뜻이에요?" 묻길래, 다정하게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아이는 이해되었다는 표정으로 "아~ 그렇구나." 하면서 자기는 엄마, 아빠를 존경한단다. 거기까지는 마음속에 차오르는 흐뭇함을 숨길 수 없었다.


다른 집안일을 챙기다가 갑자기 아까 아이가 하던 숙제가 생각나서 기쁜 마음으로 다시 열어보았다.


엄마, 아빠를 존경하는 까닭은, 가족이 보고 싶어서... 라니?!


음.. 어쩌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이렇게 쓰는 거 아니야, 틀렸어, 다시 생각해 봐. 말하려다가 만화를 보며 행복해하는 아이 얼굴을 보고 그냥 놔뒀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말 천천히 가야지 어쩌겠어.


이유야 어찌 됐든 존경받는 엄마, 아빠가 된 것만 해도 어디니. 요즘같은 세상에 자식한테 존경받는 엄마가 어디 흔하니? 그래 나 아들 참 잘 키웠다. 정신승리해야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한 없이 행복해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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