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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Oct 05. 2023

외향적이지만 사회성은 없는데요

MBTI 결과는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

요즘 아이는 MBTI에 꽂혀 있다. 달리 말하면 MBTI가 주요 집착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유아기부터 늘 몇 가지 한정적인 분야에 꽂혀서 그것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게 내 아이의 큰 특성 중 하나이다. 처음엔 너무 싫었는데, 이젠 그것도 일상이 되어서 반포기한 채 어느 정도 받아들이며 지낸다.


최근에는 야구 규칙, 동네 지도,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 따위가 집착거리였는데 최근에 MBTI가 하나 추가된 것이다. 어디서 MBTI에 대한 만화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이는 강한 매력을 느끼고 묘하게 빠져들었다. 16가지 성격 유형이 제시되어 있는 표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은 두 눈 가득 호기심에 빛나고 있었다. 제발 그런 눈빛을 좀 또래친구들과 어울릴 때 발사했으면 좋겠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MBTI 만화책을 보면서 엄마, 아빠는 어떤 유형이냐고 자꾸 물어보기 시작했다. 요새 상당히 유행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런 성격 유형 검사 따위 별로 신뢰하지도 않고 흥미도 전혀 없었다. 몇 년 전 성격유형심리검사라는 연수를 받으면서 나온 결과를 뒤늦게 찾아보았다. 내 성격유형은 ISFJ였다.


아이는 아빠에게도 어서 알려달라고 채근하면서 검사 결과를 굉장히 궁금해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남편도 나와 같은 ISFJ였다. 남편은 좀 기분 나빠했다. "네가 나랑 같은 ISFJ라고? 다시 해봐." 하며 내 성격유형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나도 뭐 기분이 딱히 좋은 건 아니었는데 상대방이 워낙 불쾌해하니 그때 검사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인터넷에서 찾아 다시 한번 정말 신. 중. 하. 게 검사에 임했다. 결과는 같았다. 남편도 아이 등쌀에 못 이겨 재검사를 했지만 역시나 똑같은 결과였다. 왜 하필 16가지 성격 유형 중에 우리는 같은 유형이란 말인가. 같은 성격이라 더 자주 부딪히는 건가? 반대였다면 덜 싸웠으려나.


아무튼 아이 덕에 우리 집에는 때아닌 MBTI 바람이 불었다. 아이는 자신의 유형도 궁금해했다. 하지만 검사 내용 자체가 쉽지 않아서 문항 내용을 이해하고 자신의 성향과 일치하는 쪽으로 답을 한다는 게 아이에게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언어 이해력이 높은 또래 아이들이라면 모를까, 문해력도 낮아서 고민인 마당에 MBTI 검사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말렸다. 어차피 그런 검사는 돈 내고 결제를 해야 가능하니까 그냥 만화책이나 보라고 했다.


그럼에도 아이의 MBTI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그냥 검색이나 해보자 싶어서 검색창에 "초등학생용 MBTI 검사"라고 쳐보니 무료로 제공되는 사이트가 나왔다. 굉장히 쉬운 문항으로 구성되어서 초2 수준에도 어렵지 않게 체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가 어렵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편입니다"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게 좋습니다"

"친구들에게 양보를 쉽게 합니다"


이 정도 수준의 내용은 이해 가능한 범위이고 조금 어렵다 싶은 문항은 내가 추가 설명을 해주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대체로 그렇지 않다, 보통이다, 대체로 그렇다, 매우 그렇다 다섯 가지 답변 중에 아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정도를 정확하게 체크할 줄 알아야 하는데, 뭐 그냥 대충 선택하도록 내버려 뒀다. 시험도 아니고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 적당히 하면 되겠지.


아이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꽤나 진지하게 검사에 임했다. 자신의 결과가 무엇일까 굉장히 궁금해하는 듯했다. 그런 아이를 보니 나도 살짝 궁금해지긴 했다.


검사 결과는 ESFJ였다. 별칭은 "사교적인 외교관"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이의 성격과는 굉장히 상반되는 결과였다.


ESFJ 유형의 주된 관심은 사람들 간의 평화와 조화다. 타인의 정서, 욕구, 동기에 관심이 많으며, 사람 사이의 관계에 민감하고 어딜 가더라도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이끌어낸다. 이들은 따뜻하며 감수성이 풍부하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만큼 자신도 관심받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피드백을 들을 때 커다란 행복감을 느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SFJ는 사교적인, 협동적인, 조화로운, 우호적인과 같은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사회성 발달 지연으로 또래 아이들과 제대로 된 상호작용도 어려웠고 장기간의 치료 끝에 아주 개미눈물만큼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아이가 사교적인 외교관이 나오다니. 역시 이런 심리검사 따위 믿을만한 게 못 되나. 그냥 재미로 하는 게 맞나 보다 하고 웃어넘겼다.


추석연휴에 가족 친척들과 만나서 놀면서 MBTI 이야기가 또 나왔다. 의외로 여태 아직 MBTI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가족도 있었다. 아이는 친척들을 채근해서 당장 검사를 해보게 했다. 그러면서 아이도 한 번 더 검사를 해보았다. 이번에는 어린이용도 아니고 무료로 배포된 성인용으로 해보았다. 문항을 이해하든 말든 사촌들과 합세해서 대충 자신에게 가장 맞다고 생각하는 걸 선택하게 내버려 뒀다.


이번에는 또 다른 결과가 나왔는데, 바로 ESFP였다. 별칭은 연예인형이었다. 내 아이가 연예인형이라고? 저번 결과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여전히 외향적인 E였다. 사교적이고 친절하고 새로운 상황과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편이고 유연하며... 등등 전혀 현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거 뭐야 완전 엉터리잖아.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번쩍 들었다. MBTI 검사는 어찌 됐든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 평소 자신의 성향과 행동을 반추하면서 가장 적합하다 싶은 것을 선택하면서 이루어진다. 즉 자기 객관화를 해 볼 수 있다. 내가 평소에 주변 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메타인지를 사용해서 생각하게 만드는데 아이도 어리긴 하지만 나름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서 검사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는 자기 스스로를 상당히 "외향적인"사람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늘 아이가 친구들과 못 어울리고 아홉 살인데 제대로 된 친구 하나 못 만들고 있으니 답답하고 안타깝고 언제 좋아질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재미있고 좋다는 문항에 매우 그렇다 쪽으로 대답을 했고 사회성 관련 문항에서 거의 다 잘 논다는 쪽으로 선택하다 보니 E가 나온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아이와, 아이가 스스로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는 모습은 꽤나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는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잘하고, 주목받는 것도 좋아하는 등 사교성 있고 조화로워서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가 ADHD 증상이 아니었다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아이가 발달지연 증상 없이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ADHD가 없는 아이의 모습은 MBTI 결과에서처럼 또래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고 리드도 하며 꽤 인기 있는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검사 과정에서 "혼자 노는 게 편하다"라는 문항이 나왔는데 아이는 혼자 노는 건 재미없다고 말하면서 같이 노는 게 좋다고 했다. 그만큼 아이의 본래 성향은 사람을 좋아하고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며 보내는 시간을 행복해한다. 친구들이든 가족들이든 늘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녀석인데, ADHD 때문에 언어 발달도 느릴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사회성도 느려지고 자존감도 바닥을 치다 보니, 결국 주의집중력 조절해 주는 약과 더불어 항우울제 성분의 약까지 복용하면서 치료 중이다.


ADHD가 없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그 얼마나 쓸모없는 상상이란 말인가. 어차피 아이는 이 모습으로 처음부터 나고 자라고 있는데 ADHD조차 아이의 일부분임을 부정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마는 것이다.


주말에 동네 소아과에서 그리고 서점에서 아이들 유치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엄마들을 만났다. 나와는 성격이 꽤 맞는 편이라 사실 엄마들끼리는 근 몇 년간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편이다. 내 아이는 그 아이들과는 몇 년간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색함을 유지하는 사이다. 조금이라도 어울리게 해보려고 그 친구들이 있는 놀이터에 매일같이 데리고 나간 일, 생일 파티에 초대하고 초대 받은 일, 야구장에 함께 간 일, 키즈카페에 같이 다닌 일 등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아이는 MBTI 검사 결과 E와는 전혀 다르게 그 아이들을 낯설어하고 딴청을 부리며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친구들이야말로 외향적이고 활달한데도 조금 어색해하는 내 아이에게 다가가기 불편했는지 별달리 알은체 하지 않았다.


내 아이가 그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면 우리도 아마 그 무리에 끼어서 함께 병원도 가고 서점도 다니면서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늘 그렇듯 아이와 단 둘이 다닌다 나는. 이런 상황, 이런 모습이 적응될 법한데도 가끔씩 이렇게 현실을 마주할 때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시큰해진다. 그래도 언젠가는 외향적이라는 본래 성향이 조금씩 발현되어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좀 끌고, 리더역할도 한번 쯤 해볼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고문을 오늘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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