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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27. 2024

집착 증상도 쓸모가 있다고요

아이의 취미생활이 학교수업에서 빛을 발하다

ADHD의 특징인지, 자폐스펙트럼 성향의 영향인지, 시각추구의 일환인지 정확인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아이는 특정 대상을 향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 지금까지 아이를 키운 건 팔 할이 집착 대상이다. 무언가에 꽂히면 상당한 기간 동안 머릿속에 오로지 그 한 가지 주제만 자리 잡혀서 쉽사리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영유아기에는 숫자, 한글, 한자, 도표, 식당메뉴판 따위로 도식화할 수 있는 문자에 강하게 집착했고 초등기에 들어서는 코딩, 야구경기규칙, 게임, 지도 등으로 진화했다. 아이가 특정 대상에 꽂힐 때는 눈빛이 달라진다. 그 눈빛은 마치 사냥감을 막 발견한 상위 포식자처럼 강렬하게 빛난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조용히 집착 대상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에 그 정보를 있는 그대로 사진 찍듯이 저장해 두는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그대로 저장된 그 시각 정보는 그대로 두어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 아이는 스케치북과 종합장 같은 백지만 있으면 닥치는 대로 그려댔다. 발달장애 아이를 따로 키워본 적도 없고, 자식은 처음 낳아 키워보는 초보엄마인 나는 보통 애들도 이러고 노는 줄 알았다. 내 아이만의 특이한 행동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 몇 년 걸렸다.


스케치북에 그려놓은 그림이나 글을 보고 있자면, 어쩜 이렇게 섬세하고 자세하게 묘사할 수가 있는지 믿을 수가 없어서, 이 아이의 지나치게 뛰어난 기억력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이는 곧 뛰어난 기억력을 갖춘 영재가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감을 심어주기도 했다. 대신 나에게 주어진건 발달장애라는 진단명뿐이었지만 한 때는 덕분에 잠시 설레었으니 그걸로 족하다.


아이의 주된 취미 활동 중 하나는 그림 그리기다. 백지 스케치북만 있으면 어딜 가도 심심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이것저것 머릿속에 있는 정보들을 토해내듯 그리는 게 일상이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는데 이게 매일의 일상이 되고 보니 이제 새로울 것도 없고 또 그림 그리고 있구나 하는 식이 되는 거다.



저번 겨울 방학에도 아이는 내내 지도를 그렸다. 동네 지도 그리기는 원래 즐겨하던 일 중 하나였다. 나랑 자주 다니는 다이소, 스타벅스, 작은 도서관, 수영장, 마트 그리고 본인이 자세히 봐둔 가게 등을 더해서 도로와 방향까지도 썩 정확하게 그려냈다. 아파트 단지 위치며 놀이터나 학교 위치 등 너무 정확해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동네 그림을 그리다 질리면 우리나라 지도를 그렸다. 자기가 가본 지역 위주로 여기저기 그리고, 그것도 지겨우면 지하철 노선도를 그렸다. 한 때는 지하철 노선도에 심하게 빠져서 1호선부터 지금 공사 중인 노선까지 모든 역을 다 외워버릴 기색으로 덤벼들었다.




다낭 여행 이후로 더더욱 심하게 세계 지도에 집착했다. 여행 준비하면서 세계 지도에 관심을 가지더니 심심하면 따라 그리면서 놀았다. 굳이 알 필요 없는 저 먼 나라 아프리카의 레소토 같은 나라나 중남미에 듣도 보도 못한 섬나라까지 외우려고 애를 썼다. 지도에서 국기로 진화되어 시키지도 않은 전 세계 국기 그림을 한 시간 이상 꼼짝 않고 앉아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내버려 둘 때도 있었고, 왜 맨날 이런 것만 그리냐고 핀잔을 줄 때도 있었고, 자존감 좀 채워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새삼 칭찬해 주면서 어쩜 이렇게 잘 그렸냐고 추켜세웠다. 어차피 내가 화를 내든, 칭찬을 하든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소명인 양 아이는 열심히도 그렸다.


초3이 되니 가장 큰 변화중 하나는 1, 2학년에 비해 과목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영어뿐 아니라 사회, 과학 과목도 추가되었다. 처음 배우는 과목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까 봐 만점왕 문제집까지 주문해 놓고 기다리며 하교하고 오면 복습을 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날 시간표를 보면서 오늘은 뭐 배웠냐고 물어보는 게 일상이다.


하루는 사회 시간이 엄청 재미있었다며 흥분된 표정이었다. 처음 접하는 사회라는 과목이 생소했을 텐데 뭐가 재미있었을까, 물어보니 첫 단원이 우리 고장에 대한 내용인데 사회시간에 무려 우리 고장에서 본 장소를 색칠하고 발표하기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건 아이에게 껌 씹기처럼 너무나 쉬운 과제가 아닌가. 평소 취미 활동을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하라고 시켰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꼬. 아이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동네 지도를 그리고 색칠했다는데 선생님께서 아이의 작품을 보고 잘했다며 진짜 우리 동네 지도랑 거의 일치한다고 칭찬을 해주었단다.


아.. 한낱 쓸모없는 짓이라 여겼던 아이의 취미활동이 학교 수업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지도 집착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시각 추구"의 일환이다. 정상발달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들어본 적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개념이지만 느린 맘 카페에서는 누구나 아는 용어 중 하나다. 느린 아이들은 보통 청각적 주의력이 낮아서 남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귀 기울여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언어습득도 느리고 사회성저하까지 겪게 된다. 대신 시각적 주의력이 뛰어나서 눈으로 들어온 정보에 대한 습득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자폐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지만 동물학 박사까지 전공하면서 미국 가축 시설 설계도를 개발했고 대학 교수인 베스트셀러 작가 템플 그랜딘도 <비주얼 싱킹>이라는 책을 썼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시각적 사고자로 살아가는 본인의 이야기를 써냈다고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아이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 템플 그랜딘의 책은 굉장히 많은 영감이 되었고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내 아이도 잘 자랄 수 있다는 한줄기 희망까지도.


내 눈에는 흔한 증상 중 하나에 지나치치 않은 "시각 추구" "특정 대상 몰입" 활동인 지도 그리기가 공교육 일반 초등학교, 일반반의 정규 과목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모든 학생들에게 내주신 수업 활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큰 영감을 안겨다 주었다. 


진단명에 갇혀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어느덧 아이를 향한 편견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보통 아이였다면 그냥 애들이 평범하게 노는 방식 중 하나로 여겼을 지도 그림 그리기를 나는 시각 추구라는 늪에 갇혀 "ADHD 증상"이라고만 여기지 않았나. 그런데 그 "증상" 중 하나가 보통의 세상에서 인정받는 활동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고 표를 따라 그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한숨을 내뱉었는가. 언제쯤 보통 아이처럼 평범한 취미를 가지고 놀게 될 수 있을지 그날이 오기는 할는지 하면서 절망하고 고민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열심히도 하는지, 그런데 그 쓸모없는 짓이 이제는 학교에서 칭찬받는 도구가 되었으니 나는 할 말이 없다. 앞으로도 그저 내 눈에 하등 쓸모없는 취미를 일삼든 말든 그냥 좀 내버려두려 한다. 


사십 대가 된 나는 점점 구세대가 되어가고 최첨단 AI와 챗GPT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시대에 앞으로 어떤 직업이 대세가 될지 한 치 앞도 내다보기가 어렵다. 그저 안정된 직장만 바라보고 살던 내 부모세대와 나는 이제 자라나는 아이에게 전망이 좋은 분야를 앞장 세워 안내해 주고 지도해 줄 혜안도 가지질 못했다.


지금의 쓸모없는 짓들이 모이고 모여 아이가 성장하는 자양분이 될지 혹시 모를 일이다. 진단명에 갇혀 그저 친구가 없고 발달이 느린 아이의 지루한 취미라 여겼던 것들이 어느 순간 세상에 쓸모를 얻어 빛을 받고 어딘가에서 쓰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란 말이다. 


그런 한줄기 희망을 이번 사회 수업 활동을 통해 보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문제의 대상으로 볼게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나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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