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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첼쌤 Mar 20. 2024

커서 알바라도 할 수 있을까

느린 아이맘 단상

주말 오전 브런치 같은 늦은 아침밥을 먹고 점심을 거른 터라 오후가 되니 허기가 몰려왔다. 나를 포함한 온 가족이 배가 고파서 원래 가려던 식당은 찾기도 귀찮은 상태였다. 눈앞에 보이는 식당 중에 브레이크타임이 없는 곳을 골라 들어갔다.


아직 5시도 안 된 시각이었다. 브레이크 타임 없이 문을 열어준 것만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 식당은 일본식 가락국수집 같은 콘셉트이었는데, 일렬로 된 식탁에 안 쪽으로 주인이 요리하는 모습을 훤히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일본 영화 심야식당에서 볼법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키오스크에 서서 신중한 고민 끝에 일인당 하나씩 메뉴를 주문하고 착석했다. 본디 이런 식당은 의자가 굉장히 높은 편이라 어린아이들은 앉기 불편한데, 아이는 이제 제법 키가 커서 그럭저럭 앉을 수 있다. 식당에 와서 음식 나오기 전까지 지루할 때면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이나 하려는 아이를 겨우 말렸다. 대부분 눈감아 주는 편이지만 이것도 학습화되서 매번 게임하는 걸 당연시 여기는 것 같아서 한 번씩은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편이다.


기분이 상한 아이는 자기 그럼 심심한데 뭘 하느냐고 따진다.


"저기, 요리사님이 우리 먹을 음식 요리하는 거 한 번 봐봐. 신기해."



아이에게 보라고 재촉해 놓고 되려 내가 그 모습에 빠져들었다.

이런 식당구조를 만드는 이유가 있나 보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이 나를 위한 요리를 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는 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메뉴가 세 개다 보니 프라이팬과 냄비가 여러 개 동원된다. 요리하는 직원은 젊어 뵈는 여자였다. 아직 저녁밥시간이 아닌지 혼자서 일한다. 분명히 같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잠깐 보였는데, 아직 저녁때 전이라 투입 시간이 아닌지 쉬고 있나 보다.


혼자서 요리 세 개를 동시에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시킨 건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에 우동 두 종류다. 우동 면도 삶고 소스도 따로 볶고, 돈가스는 튀기고, 함박스테이크도 굽는 듯하다. 자세히 보니까 우리가 주문한 음식만 하는 게 아니었다. 플라스틱 용기도 옆에 두고 담는 걸 보니 배달 주문 음식까지 동시에 하나보다.


직원의 빠른 동작을 넋 놓고 보고 있게 된다. 게임하고 싶다고 조르던 아이도 어느새 그의 움직임에 빠져들었는지 가만히 관찰한다. 재빠른 몸짓으로 여러 음식을 휙휙 재료를 넣고 볶고 지지고 젓는 모습을 보니,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십 년 차 주부지만 요리 서너 개를 동시에 해 본 적은 없다. 나란 사람은 나물 하나만 만들어도 부엌이 엉망진창이 되고 설거지거리가 넘쳐나서 음식 만들 때도 힘들고, 치울 때는 더 힘들다.


식당에서 일한다고 해도 요리사는 아닌 것 같고, 정해진 레시피를 따라 각 음식을 요리하는 법을 배우기는 했겠지만 혼자 능숙하게 일을 해내는 젊은 그 직원은 아르바이트생처럼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가 커서 이런 식당에서 알바라도 할 수 있을까?


우선 여러 요리를 저렇게 능숙하게 해내려면 전두엽이 활발하게 움직여야 한다. 주문이 들어오면 음식을 살펴본 후 가장 먼저 오래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작업을 하고, 재료를 꺼내고, 알맞은 요리 기구들을 세팅해야 한다. 언뜻 간단해 보이지만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특히 이런 일본식 식당은 손님이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까 한 치의 실수 없이, 늘어지는 시간 없이 척척 만들어내야 하는데 과연 아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ADHD의 특성상 전두엽 발달이 느리고, 더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지속적인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성인이 된다고 해서 보통 사람들 수준만큼 발달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치료를 하고 도움을 줄 뿐이다.


국영수 공부를 시키고, 독서를 시키고, 예체능을 가르치면서 학업 역량을 늘리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대학을 보낼 걸로 계획하고 있다. 대학이야 어느 누구든 다 갈 거고, 어느 간판을 따내는가가 더 중요해진 세상이긴 하지만. 대학 이후에 어떤 직업을 가질지, 취업을 할 수는 있을지 아무것도 내다보기 힘든 시대지만 어찌 됐건 학사 수준 이상의 고등 교육을 받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 여기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대학을 가기는커녕, 애가 이런 일터에서 알바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한꺼번에 여러 개의 주문을 받아서 착착 요리를 해내는 일이 간단해 보여도, 막상 그 일을 능숙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전두엽 역량을 발휘해야 하고 일머리도 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식당 일도 마찬가지지만 스타벅스 같은 카페에서 일하는 것도 그렇다. 어느 누구나 카페 알바 정도는 고등학력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주문을 받고, 빠른 속도로 커피를 만들어내는 일은 상상만 해봐도 간단치 않아 보인다.


만약에 한꺼번에 아메리카노, 캐러멜마키아또, 프라푸치노 같은 음료들이 뒤섞여서 주문이 들어온다면 지체 없이 주어진 레시피대로 착착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음료는 빨로 제조되어야 하는데 거기 서서 레시피북을 보고 있을 수도 없고 제조 과정이 머릿속에 담겨서 최대한 빨리 만들어질 수 있도록 순서를 지켜서, 그것도 옆 직원과 협력하면서 해야 할 텐데. 과연 그 일을 내 아이가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내가 일센스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식당이나 카페 알바는 참으로 어려워 보이고 능숙하게 일을 해내는 직원들을 보고 있으면 존경심마저 차오른다. 사실 대학 시절에도 그런 종류의 알바를 해본 적이 없고, 운 좋게 과외 몇 번 해본 게 전부다.  



천성이 굼뜨고 일머리도 없는 나를 닮았다면, 거기에 ADHD라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지니고 있는 내 아이가 과연 정규직 직업은 차치하고서라도 알바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공 공부도 중요하고,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일분일초를 앞다투는 노동의 현장에서 최저시급을 받으며 일을 해본 경험은 젊은 날 큰 자산이 된다고 본다. 내 아이도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공부를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이런저런 알바도 해보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 보았으면 좋겠다.


뇌과학 책에서 전두엽이 손상된 환자가 일상생활을 아예 영위할 수 없게 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전두엽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니까, 혼자서 커피를 만드는 것도 재료를 준비해서 요리를 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계획, 실행 능력이 아예 사라졌다고 한다. 그전에는 요리와 살림을 완벽하게 해내는 주부였는데, 기본적인 살림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국영수 공부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일들을 스스로 계획하고, 조정하고, 수정하고, 실행해 나가는 일 아닐까? 그런 면에서 내 아이는 이미 전두엽 발달 저하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뒤쳐진 상태로 자라야 하는 것이다.


보통의 20대가 돼서 스스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 일도 해보고, 상처도 받고, 돈의 소중함도 느끼면서 세상 경험을 하는 보통의 성인이 된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러면 아이가 일하는 카페든, 편의점이든, 식당이든 사람들 데리고 찾아가서 많이 팔아주고 응원도 마구마구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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