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아이 키우는 엄마에게 필요한 역량
아이의 머릿속은 정리 안된 전선줄들이 잔뜩 꼬아져 있는 것처럼 늘 복잡한 것 같다. 그래서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이 일목요연한 표현으로 잘 튀어나오지 않는다. 이러저러한 증상이 원인이 되어 결국 언어발달지연 진단을 받았고, 몇 년째 이 진단을 극복해 보고자 애쓰고 있다.
아직도 언어치료 수업 피드백에서는 늘 우리말 문법이 깨진 표현들이 많고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을 사용한다는 부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이제는 별로 상처가 되지 않는다. 5세에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만 해도 피드백 들을 때마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숨이 안 쉬어지는 등 아이의 현상태를 받아들이기가 매번 힘들었는데 그새 맷집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렸을 때 말이 한창 터지지 않던 초창기를 생각하면 지금은 그저 말을 주고받는 의사소통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감격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말 문법이 좀 틀리면 어떻고, 앞뒤 논리가 어긋나면 어떻겠는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주변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그에 맞게 반응해 주는 것만 해도 정말 감지덕지가 아닌가.
이렇게 아이 언어발달에 대한 기대치가 현저하게 낮은 이유는, 정말 영영 애랑 대화를 못하게 될 줄 알고 너무 두려웠고 무서웠던 시기가 있었던 원인이 크다. 제대로 된 상호작용이 되지 않고 앵무새처럼 반향어만 계속 사용하고, 가르쳐주지도 않은 한글을 혼자 터득해서 책만 줄줄 읽어댈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서 엄마랑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 나눠보고 평생 이 아이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싶어서 눈앞이 캄캄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용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서, 여러모로 나는 많이 대범해졌다.
이번에는 아이가 갑자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대뜸 이야기했다. 그날 있었던 일은 잘 기억 못 하고 물어보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일이 상당히 지난 과거의 일이 갑자기 생각나서 한창 후에 말해주는 경우가 다반사다.
"근데 학교에서 친구들이 나한테 왜 자꾸 말을 더듬냐고 물어봤어."라는 말을 뜬금없이 하는 것이다.
방학 시작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전에 기억이 났는 모양이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너 말 더듬는다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런 일도 여러 번 겪다 보니 많이 둔감해지기는 했다.
뭐라고 대답했냐고 물어보니 그냥 나는 원래 그래,라고 말했다고 한다. 꽤 잘한 대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말을 왜 더듬느냐는 공격적이지만 순진무구한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옳은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별 혜안을 떠오르지 않는다. 다행이게도 아이는 나 원래 그런데, 왜?라는 뉘앙스로 답을 했고 그 후에 친구들도 별 말 없었나 보다. 원래 그런다는데 뭐라고 덧붙일 말도 없었을 것이고, 짓궂은 아이였다면 말 더듬는걸 빌미로 놀릴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놀리는 친구는 없었다고 한다.
이미 과거의 기억이 된 사건을 가지고 아이를 붙잡고 왈가왈부해 봤자 아무 의미 없을 것 같아서 심리치료 선생님께 이번주 수업에 아이의 마음을 좀 살펴봐달라고 부탁드렸다. 말 더듬는다는 소리를 듣고도 괜찮았는지, 크게 상처받고 자존감이 더 하락한 건 아닌지 궁금했지만, 아이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베테랑답게 지나가는듯한 말로 누구나 갑자기 생각이 안 나거나 머릿속이 복잡하면 말을 더듬을 수도 있다면서 아이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냈고, 역할놀이를 해보면서 다음번엔 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긍정적인 경험이 되도록 강화시켜 주셨다.
심리 치료로 한 번 짚어주었으니 두 번 세 번 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그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나는 아이가 말을 더듬는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다서여섯살 때 너무 말이 안 터져서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 시절을 호되게 겪어서인지, 요즘에 아이의 표현이 좀 느리고 정확하지 않아도 이해할만한 정도다. 근데 이게 또래 아이들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나 보다. 말이 느리고 서두에 비슷한 말을 자꾸 반복하고 상황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으니 '애가 말을 더듬는다'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번 일에 대해 내가 느낀 건 이거다.
애가 말 좀 더듬으면 어때서.
말 좀 더듬는다고 아예 의사소통이 안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표현도 할 수 있고 관계 형성은 어렵다고 해도 말을 주고받을 수는 있다. 말 더듬는 거 나중에 크면 얼마든지 좋아질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지금은 단번에 고치기 어려울 것이고 장기간 이어질 성질의 증상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 더듬는 게 정식 장애가 되는 것도 아니고, 여러 상황에서 조금 어려울 수는 있지만 뭐 그렇다고 엄청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죽고 사는 문제만 아닌데 뭐,라고 내 편할 대로 생각해 버리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다른 여러 가지 생각도 떠올랐다.
ADHD 약 좀 먹으면 어때서.
친구 좀 없으면 어때서.
자존감이 좀 낮으면 어때서.
정신과 좀 다니면 어때서.
말 좀 느리면 어때서.
사회성이 좀 없으면 어때서.
소심하고 숫기 없으면 어때서.
주의력이 낮으면 어때서. (이건 좀 심각할 수도 있다)
애가 좀 느리면 어때서. 등등
느린 아이를 몇 년 키우고 보니 나의 정신적 맷집도 상당히 탄탄해졌나 보다. 좀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게 삶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치명적이지도 않고, 애한테 도움이 될 치료만 좀 병행해 주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그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어찌 됐든 살아있다는 거. 살아서 먹고, 자고, 놀고, 읽고, 배우고, 혼나고, 웃고, 울고. 그러면서 남들보다 느리더라도 성장도 하고 있지 않은가. 살아있다는 게 가장 중요한 거다.
청년 실업자가 백만 명에 육박하는 시대다. 그런데 이런 기사를 보면 참담하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그 청년 실업자 백만 명이 다 여태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 실업 상태인 걸까? 그중 일부는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가 시킨 대로 공부도 하고 학습지도 하고 학원도 다니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았던 청년들이 대부분 아닐까?
똑같은 출발선에서 준비 땅, 하고 달렸어도, 최선을 다해서 달려왔어도 제대로 된 일거리를 잡기가 힘들고 안정된 직장이란 곳을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세상이다. 내 아이가 별문제 없이 정상발달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사교육 잘 받는 아이였다고 해도 이삼십 대에 자기 직장 잡아서 멋지게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확신하기 어려운 시대다.
이런 어려운 세상에 조금 늦게 간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 돌아가게 되었다고 해서 크게 좌절할 필요도 없다. 예전처럼 정해진 나이에 정해진 수순대로 직장 잡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산다는 그 보통, 혹은 정상이라는 구태의연한 기준을 다시 검토해봐야 할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자위한다.
아이가 말 좀 더듬으면 어때. 괜찮아지겠지. 조금 느리더라도 돌아서 가면 되지.
누가 너는 왜 말을 더듬느냐고 따지면, 나 원래 그래 그게 뭐 어때서,라고 받아치고 내 갈길 가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