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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이 이지샘 Jan 31. 2024

첫 직장, 꿈과 환상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뭘 기대했는가


처음. 그러니까 시작을 할 때부터 말이다.

보는 눈이 좋고

먼 미래를 잘 예측하며

직관이 있고

한 발 더 앞서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첫 직장에 취업을 했다.

내가 사회인으로서, 공식적인 언어치료사로서 첫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 곳은 적당한 크기의 건물에 300개 정도의 병실이 있는 재활의학과가 주 진료과인 병원이었다. 병원에는 기숙사가 제공되었고 우리 집과 꽤나 멀었기에 나는 취업과 함께 기숙생활을 시작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만약 직장인이라면 첫 직장생활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는지 궁금하다. 꿈과 환상의 세계인 놀이동산에 처음 입장하는 어린아이마냥, 정말이지 설레는 마음으로 주말 동안 내 짐을 기숙사로 옮겼다. 왜 놀이동산에 갈 때 말이다. 엄마 아빠의 손을 양쪽에 잡고 신나게 흔들며 입장하지 않는가. 나도 그랬다. 엄마 아빠의 응원을 어깨 가득 싣고, 두근거림과 설렘, 또 두려움 가득한 마음으로 놀이동산에 입장한 것이다.  


우리 병원에는 많은 직원들이 있었다. 의사, 간호사, 행정직원,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기타 등등. 아주 많은 직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업무를 보며 하루가 조용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그런 곳이었다. 이렇게 직원은 정말 많았는데 '언어치료사'는 나밖에 없었다. 언어치료사는 나 딱 하나였다.






처음 입사를 한 나는 해야 할 것도 많았고, 익혀야 할 것도 많았다. 학교에서는 병원 전산 프로그램을 알려준 적이 없었고 환자에게 어떤 말투로 인사하고 대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언어치료사가 되기 위해 모인 학우들과 4년을 함께 하면서 언어치료사 외의 다른 직종의 직원들과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지도 배우지 못했다.


 해야 할 것도 많고 익혀야 할 것도 많았던 나는 정작  잘하는 법을 몰랐고 뭘 익혀야 하는지도 몰랐다. 비단 이건 학교의 탓이 아니었다. 내가 학교 '교과목 이수'가 아닌 '학교라는 작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경험화 해야 하는 것들이었고, 그것에 소홀했던 나는 앞으로 이것들을 실전에서 겪어 나가야 하는 신입이었다. 이제 막 공장에서 찍혀 나와 깃이 빳빳한, 누가 봐도 새것인 그 하얀 가운을 입은 새내기.


꿈과 환상의 세계? 환장할 세계가 시작되었다.






첫 업무로 나는 내 업무공간인 언어치료실부터 세팅해야 했다.

여태껏 물건을 사면서 해 본 고민과 노력이라고 해 봤자 그 나이의 내가 어느 정도였겠는가. 열심히 모은 아르바이트비로 여러 가지 색 중 고민하다 또 비슷한 색의 립글로스 고르기. 인터넷 쇼핑몰에서 치수를 대충보고 느낌 있는 옷 한 벌 결제하기 정도까지가 내 결제 수준이었다. 그랬던 내가 이 놀이동산에 들어와 처음 한 일은 각종 기안서와 지출 품의서, 견적 업체 리스트, 타 기관과의 수가 비교 보고서 등 처음 접해보는 서류들을 '창조'해 내 것이었다.

여차저차라는 단어로 뭉뚱그리지만 그 당시 엄청난 노력으로 만들어진 언어치료실. 환장의 놀이동산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렇게 엄청 무서운 바이킹 올라탔다.


바이킹에서 내리자마자 이번엔 롤러코스터 차례였다. 이 놀이동산은 줄을 서며 잠깐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내 팔에는 입사자에게 주어진 프리패스권이 채워져 있었기에 다음 기구에 바로 올라탔다.


나는 모집된 환자분들을 대상으로 치료를 진행함과 동시에 이따금씩 찾아오는 행정팀장님과의 면담시간에서 수가 정산의 압박에 시달렸다.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라운딩과 재활팀 스터디도 매번 나를 덜덜 떨게 하는 시간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세 달 정도 지났을 때.

쓰러질 듯한 고통과 함께 실제로 쓰러졌다. 몸살이었다.

있는 곳이 병원이라 반차를 쓰고 언어치료실 옆 병실에 누워 오후를 보냈다. 그리고 기숙사로 돌아갔다가 다시 출근했다.






행정적인 업무와는 별개로 내 직업은 언어치료사였기에 본연의 일에도 박차를 가해야 했다. 대학교 실습기간 동안 욕심을 내며 다양한 대상자를 만났지만 실제는 실제였다. 학창 시절 4년 동안 본 것보다 더 열심히 책을 찾아보았다. 주말이 되면 스터디도 했다. 하지만 치료라는 대관람차는 정상 끝에 올라 멈춰 내려올 줄을 몰랐다. 새 환자분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두려움이 생겨났고 원래 보던 환자분도 공부할수록 어려워져만 갔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치료의 방향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내가 탄 대관람차가 대체 제대로 돌아가고 있긴 한 걸까. 여기서 내려올 수 있을까. 바깥을 구경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성격 상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려웠고 먼저 말을 걸거나 스몰토크를 하는 건 상상도 잘하지 못했다. 얼굴에 다 드러나고 목소리에 다 드러나는 나는 두려움 가득한 이십 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이었다.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하기보다는 내가 혼자 하는 게 속 했던 나. 그런데 이 환장 놀이동산에서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학부시절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았던 교수님께 아주아주 긴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메일을 드렸다.


요즘은 내가 가르치는 학부 학생들과 카톡을 주고받는 것이 스스럼없는 그런 시대이지만, 그 당시에는 교수님께 문자 한 통을 보내는 것도 예의를 고민하게 되는 일이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그 당시는 아직 카카오톡이라는게 없었던 2009년 어느 겨울이었다.

어쨌든 고민 끝에 보내게 된 메일.  잘 지내시냐는 상투적인 인사로 시작해 조심스럽게 보낸 메일은 대관람차에서 마주한 줄기 과도 같았다.  그렇게 교수님과 수 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며 나의 치료에 대한 방향성과 궁금증을 해결하고, 치료 자료를 만들고 평가보고서를 쓰며 밤을 보내던 하루하루들. 주고받는 메일들은 다음 년 여름까지 이어졌고, 그렇게 이 대관람차는 서서히 땅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놀이동산의 빠질 수 없는 묘미, 귀신의 집.

낮 병원생활과 저녁 기숙사생활로 인해 내 몸은 온통 첫 직장에 붙어있었다. 주말이나 퇴근 후에는 최대한 이곳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남자친구를 만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남자친구는 당시 1년을 반은 육지에, 반은 바다에 반 머무르는 상태였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에는 거리가 꽤나 멀었다. 필연적으로 나는 직장 내 직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고 직장의 특성상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았다.


내가 새로운 단체에 끼어들 때 몇 번 들어보았던 삐걱거리는 소리는 첫 직장에서도 들려왔다. 마치 귀신의 집에 처음 입장할 때 듣는 음산한 소리처럼. 첫 직장의 단체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언어치료사는 나 하나였다. 상대적인 관심이 쏟아졌지만 나는 사회적 기술이 미숙했다. 아. 스몰토크를 잘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좀 더 긴장감을 내려놓고 유연하게 대화를 했더라면. 사람들의 모임에 유연하게 참여하고, 기숙사 내 같은 방을 쓰던 선생님들의 개별적 성향을 빠르게 파악했더라면. 그랬다면 얼마나 더 그 생활이 더 빨리 편해졌을까. 내 대화기술은 언어치료사라는 명함을 붙이기 낯부끄러운 수준이었다. 그때의 나는 상대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단체에서 빠르게 적응하기 어려운 요소란 요소는 다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직장생활인데 내 할 일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까지 사람들이랑 어울릴 필요가 있을까?' 맞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뭐랄까. 해수욕장 뒤편에 버려진 스티로폼 덩어리 같았다. 커다란 바다에 일분일초 밀려오는 파도에 뉘어진 채, 파도에 방향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스티로폼. 육지까지 밀려나 고여버린 부유물들이 덕지덕지 붙은 그런 스티로폼 같았다. 타인의 한마디에 휩쓸리고, 상대의 눈빛에 또 휘둘리는. 크기는 커다랗지만 사실 굉장히 가벼워 그저 바닷물의 움직임을 따라 휩쓸리는 스티로폼. 나는 타인의 평가에 민감했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본질을 찾기에 앞서 무턱대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그 새하얗던 가운을 몇 번쯤 빨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게 되었을 때쯤. 익숙하게 출근해서 환자분들을 마주해 치료를 진행하고, 행정업무를 수행하며 퇴근 후 직원들과 소소한 잡담을 나누는 내가 있었다.


모든 걸 다 잘 해내지는 못했고, 모두와 다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하루를 다소 익숙하게 보내내기 시작했고,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중 몇 명과는 친밀한 관계가 되어 있는 내가 그곳에 있었다.


적응 익숙함이 찾아온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일이다.

매달 받는 크지는 않지만 소중했던 월급으로 열심히 적금도 모으고, 주말엔 간간히 기분전환도 했다.

그렇게 익숙함에 익숙해질 때 즈음.

미세하게 느낀 미묘한 감각.

미묘하게 불편한 감각.


그동안 정신이 없었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느낌. 그 느낌이 스멀거렸다. 불안감은 아니었다. 뭐였을까. 그 감각을 어떤 언어로 표현하면 좋을까.


문득 나의 지금 상황과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나를 내쫓을 사람은 없었고, 병원이 망할 것 같지도 않았다(생각이 나서 검색을 해보니 내 첫 짓장인 그 병원은 지금도 잘 운영되고 있었다). 먼저 입장했었던 다른 동료 선생님들은 이 놀이동산을 이제는 익숙하고 즐겁게 즐기고 있었다.  


익숙하고 편해졌지만 뭔가가 자꾸 걸렸다.

손이 잘 닿지 않는 등 어딘가에 난 여드름처럼.

자꾸 이 감각이 신경쓰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보다 꽤 많이 연차가 쌓인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수다를 떨다 깨달았다. 불편한 마음이 들었는지.


너무 명확하게 그려졌다.

미래의 내 모습이.


5년 뒤, 10년 뒤 내가 어떤 하루를 살고 있을지를 동료선생님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정해진 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호였다.

월급은 해마다 조금씩 오를 것이고 업무도 많이 익숙해졌으며 친한 이들도 생겼다. 그런데 그 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편한 게 좋은 나인데.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나는 내 첫 직장에서 정말 많은 걸 경험할 수 있었고 배울 수 있었다.

사회라는, 단체라는 세계에서 나 자신이 정말 작고 보잘것없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더 나부터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직장인 사회생활 개론' 이론 편도 배웠다. 환자분들, 환아들과 언어치료를 하면서 느낀 갈증과 즐거움들. 이론도 이론이지만 이 일을 더 열망하고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게 된 것도 정말 소중한 배움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가 내 미래를 보다 여러 가지 선택지 중 고르고 싶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느덧 이 환장의 세계는 나에게 귀한 경험과 즐거움을 안겨 준 진정한 놀이동산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이 놀이동산을 퇴장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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