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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이 이지샘 Jan 24. 2024

학교에서 배운 것 Vs. 현실 세계-2

넌 이미 전문가야.



대학을 졸업한 분이라면,

졸업 직전의 시절이 기억나는가?


우리는 삶을 살면서

무언가가 나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시기를 여러 번 경험한다.

마치 무지개 색 가득 찬 스펙트럼처럼

온통 빨간색인 듯했던 나날이 스르르

어느 순간 노란색이, 파란색이,

그리고 보라색이 되어있다.

그리고 사실 이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은

사실 한 줄기의 빛에서 기인한다.


누군가는 이 시기를 자기 인생의 첫 역동의 시기라 부르기도 할 것이고,

몇 차례를 겪은 누구는 더 이상의 변화는 싫고 한 가지 색에 정착하고 싶다고 느끼기도 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자신의 이번 회차 새로운 시작의 끝이 무슨 색으로 귀결될지 흥미진진해하기도 할 것이다. 


떨림을 가져오고,

두려움이 동반되며

기대를 안게 되는 그런 시기.

 

여러분들은 살아오면서 지금껏 이 스펙트럼 같은 변화의 시기를 몇 번이나 거치셨을지.

그리고 그 경계 모호한 스펙트럼 속에서 겪는 변화의 색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마주하셨는지.


 




실습과 동시에 나를 포함한 그 시절 4학년 언어치료학과 학생들은

언어치료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준비해야만 했다.


때는 2009년,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그 시절 다이어리를 들춰보면 온갖 부끄러움이 난무하다.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당장은 놀고 싶은 치기, 거창한 척 써 놓은 실습일정들 등등.

그때 만나고 있었던 현 남편이자 당시 남자친구와 싸워서 공부가 안된다는 둥

몇 월 언제까지 무슨 과목을 섭렵할 거라는 둥

얇디얇은 종이 안에서 나 혼자 바쁘고 나 혼자 난리가 났다.


과거 언어치료사는 현재 언어재활사로 명칭이 바뀌며

현재는 국가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여야만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나 때는,

이런. 이 말을 쓸 때마다 편향성이 느껴지니 정정하자.


과거에는

언어치료사는 민간자격이었다. 당시의 명칭은 '언어장애 전문가'. 시험방식은 현재와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 굳이 이 이야기를 한 번 하고 넘어가는 이유는

내가 비교적 과거의 사람이었던 탓에 언어재활사 1급 자격을 취득하기까지

여러 번의 시험을 치러야 했다는 게 조금 슬펐기 때문이다.


나 때는,

아이고 또 나왔다.


과거에는 시험을 치르기 위해

내가 있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가야 했다.


그다지 머리가 똑똑하지는 않은 나였기에

수월하게는 아니고 어찌어찌 합격을 했다.


내 머릿속에는 인생을 살며 극의 감정이 물든 순간들이 찍힌 사진을 모아놓은 사진첩이 있는데

합격 소식을 들은 그 순간은 내 머릿속 사진첩 한 귀퉁이에 소중이 꽂혀있다.

15년가량 전의 일인데도 그때 합격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 목소리가 선명하다.

그때의 날씨와 냄새, 더위로 내 몸에 살짝 들러붙어 있던 티셔츠의 감촉,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내 환호의 비명까지 그 사진 한 장에 모두 담겨있다.






합격을 하고 난 뒤에도 아직 4학년이 끝난 것은 아닌지라 학교를 다녔다.

학기를 마무리해 가던 가을과 겨울 사이.

그 당시 나는 실습과정과 관련된 된 여러 서류들을 정리해서 교수님께 보고 드리는

실습조장 같은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실습을 담당해 주신 교수님과 그 시기 때 대화를 나눌 가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대학생활 4년 간 교수님을 먼저 찾아뵙거나

교수님께 열정을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가 전혀 아니었다.

강의실 맨 뒤에 주로 앉고,

자주 졸고. 떠들고.

학식 진짜 맛없는데 오늘은 뭐 먹지가 최대 고민거리인 그런 대학생.


그런 나에게 '교수님'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어렵고, 멀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지금 떠올려 봐도

유연한 대학생활, 사회생활. 이런 단어는 참 나랑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가 실습조장을 하게 되었을까?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 덕에 교수님과 몇 마디라도 할 기회가 생겨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시간이 흐르며 나와 동기들은 발 빠르게 취업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 주변 동기들은 모두 빠른 취업을 원했다.


지금처럼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지도 않았고

나는 내 모교 언어치료학과의 1기생이었기에 선배도 없었다.

그래서 혼자 고민을 하다 면접을 보기로 결정한 취업지를 조심스럽게 교수님께 말씀드리며

용기 내 자문을 구했다.


내가 자문을 구한 곳은 경상남도 어딘가에 위치한 300 병상 규모의 2차 병원에 있는 재활의학과였다.

나는 어릴 적 서울에서 살다 부산으로 이사를 왔는데

내 어릴 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서울살이 보다는 지방살이를 원했다.

그러나 '첫 직장은 그래도 위로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하는 고민이 이어졌다.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다 만리장성을 쌓았고

모습을 뵈면서 점점 흠모하게 된 교수님께 자문을 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교수님의 의견은 긍정적이었고

지금은 그 어떠한 결정도 난 것이 아니니 면접을 먼저 봐 볼 것을 권하셨다.


연구실 문을 닫고 나오며.


반대로 이때의 내 모습은 참 어리석은 모양새였다.

면접도 보지 않았는데

여기를 갈지 저기를 갈지 고민하는 모양새가 어찌나 자기 고양적 편향인지 말이다.

하여간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과는 정말이지 거리가 멀었다.


이성, 지혜, 소통, 이해, 행동.

나름 대학생 시절에도

독서는 자주 했는데.

자기 계발서 참 자주 봤는데 말이다.


나는 밤송이 속 밤이었고

레벨 1짜리

나무 단검 하나를 든 알몸 기사였다.

공략집도 없이

어떻게 찍어야 할지 감도 없는

스텟을 하나씩 찍어 나가야 할 시기였고

시작점에 서 있었다.

학생에서 전문가로.

빨간색을 필두로 했던

무수히 많은 색이 섞인 스펙트럼 속에 들어와 있었다.

 


  




면접에 붙었다.

첫 면접도 강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지만

내 머릿속 사진첩에 끼워진 사진은

면접을 보고 난 뒤 교수님과의 대담시간이었다.


나는 말했다.

아니 칭얼대었다.

너무 무섭다고.


'교수님, 저는 아직 제대로 된 언어치료사도 아닌데 막상 거기 입사를 하려니 너무 떨려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 칭얼거림에 교수님은 또 한 번 현답을 주셨다.


지영아, 넌 이미 전문가야.

너는 이미 언어치료사야.

항상 그걸 기억하고,

네가 어떤 행동을 하던 전문가라고 생각해.

전문가처럼 해.

그럼 그렇게 돼.

이미 넌 전문가니까.


그 순간은 두 번째 사진으로 찍혀

내 머릿속에 오롯이 박혔다.

확신에 찬 교수님의 눈빛과 내 두 어깨에 닿은 손의 감촉,

그때의 공기. 연구실의 냄새.  

교수님의 목소리. 내 얼굴 근육의 떨림들.


나는.

나는 설득당했다.


그리고 이 날의 설득은

후일 또 내가 언어치료사로 살면서

내가 뿌리내리게 되는 '본질'을 인식하는데 강력한 비료가 되었다.


그날 미약하게 느꼈다.

나에게 이미 들어선 생각은 저 먼 곳과 연결되어 있음을.


나는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겠구나.

웃기지만 정말이지 그렇게 느꼈다.

나는 전문가가 되고 싶구나.

나는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어. 


이지샘으로서 내 태도와 내 행동, 그리고 내가 결정할 생각에 대한

방향성은 그때 밑그림이 그려졌다.


저어기 깊은 곳에 

무엇이 될지 모르는 끄적임 같지만

나중에 보고 나면 

'와, 이게 이 그림이었어?'소리가 나오는 작품들처럼

그렇게 첫 밑그림이 그려졌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이 알바생에서 저 알바생으로,


그리고 학생에서 전문가로.

내 인생에서 참 중요했던

n번 째 새로운 시작은

이렇게 단추가 채워졌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님들 중에서도

n번 시작을 마주하고 있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그렇게 되고 싶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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