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정 나비를 원하는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수많은 고민들 앞에 멈춰 설 때가 많다. 하나의 고민이 해결되면 어느덧 또 다른 고민이 눈 앞에 있고 고민이 해결될 때까지 그 고민을 붙잡고 있다. 하루는 달리기 경주를 하듯 하나의 고민의 바통이 다음 고민에게 넘겨주기도 하고 결국 그 고민의 해결되는 도착지점까지 운동장을 돌고 도는 듯하다. 이번 도서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정독하며 그런 ‘고민 많은’ 나의 모습이 마치 책 속의 ‘호랑 애벌레’ 같은 모습과 같았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이 책 속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라는 질문을 생각나게 했다.
6p. "그래서 호랑 애벌레는 오랫동안 그늘과 먹이를 제공해 준 정든 나무에서 기어 내려왔습니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며 삶의 다른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깨달은 호랑 애벌레는 오랫동안 그늘과 먹이를 제공해 준 정든 나무에서 내려오는 모습의 그림을 한참을 보았다. 작고 작은 애벌레가 큰 나무 위에서 먹고 자라는 것 외에도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하늘로 치솟고 있는 커다란 기둥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일부 느끼진 않았을까라고 생각해보았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면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따뜻한 햇볕 줄기와 바람이 살랑일 때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자연의 소리들과 같은 것들을.
호랑 애벌레에겐 그 모든 것이 그저 ‘일상적인’ 것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책 속엔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미 나무 위에서 다른 애벌레들의 모습을 보며 ‘호기심’과 ‘이끌림’이 더 넓은 세상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려온 것도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호랑 애벌레와 같이 ‘오랫동안 그늘과 먹이를 제공해 준 정든 나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나에게 정든 나무는 결혼 전 직장이었고, 어릴 적부터 지내온 동네였으며, 많은 것을 배우고 누린 교회 공동체였다. 그중에서도 내가 어릴 적부터 지내온 동네를 생각나게 했다. 학창 시절 늘 친구들과 무리 지어 다녔다.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리 속엔 늘 홀로 있는 아이가 있었고, 그런 아이 옆에 가면 어느새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일명 ‘왕따’라는 것을 경험하며 다른 많은 이들이 느끼는 고향이 주는 편안한 익숙함을 그 동네에서 느껴보진 못했다. 매일이 힘들었던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마음이 서러웠던 기억만 남아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대학은 고향과는 떨어진 곳으로 갔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이 전의 모습은 이제 없어, 밝은 모습으로 시작해보자’라며 청년의 시간을 보냈다. 오랫동안 그늘과 먹이를 제공해준 곳을 떠나도 괜찮았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시작의 호기심과 나 자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흥미와 위안을 느낄 수 있었다.
p46. "호랑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의 머리에서 내려와 속삭였습니다. 미안해”
결혼 후 많은 것이 변화되고 있다. 결혼 4년 차에 접어든 이제든 신혼부부에서 중년부부로 넘어가는 즈음에 있겠다. 2017년 12월 새로운 길로 걸어가듯 예식장에서 사회자의 “신부 입장!”의 외침과 함께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둘이 되어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결혼 3년 차에 고비가 온다고 했던가, 누가 내뱉은지도 모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나의 구남자 친구이자 현 남편인 자상한 오빠와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좋고 행복한 시간들만 있을 것 같았던 우리의 시간들 속에 작고 큰 말다툼은 서서히 강도 높은 억양과 목소리로 변해갔다. 결혼 초기 우리가 해결하기 어려운 주제이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으로 다툼은 오래가지 않았고, 해가 지기 전 남편의 사과를 통해 비교적 잘 마무리되기도 하였다. 시간이 점점 지나오면서 수차례 생각’만’ 했다. 나는 왜 “미안해”라고 먼저 사과하지 못하는 걸까,
먼저 생각 든 것은 ‘쓸데없는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것은 내 잘못임을 인정하는 것 같았고, 나의 심신이 안정되기 전까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굳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그런 내가 너무나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자신의 잘못의 유무와 상관없이 먼저 사과하는 남편의 용기도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마음을 먹었다. 나도 먼저 사과를 해보기로.
어느 날 남편과 사소한 다툼이 오고 간 뒤 나도 먼저 용기 내어 사과해보리라 굳게 다짐을 하고 거실 소파에 무심한 듯 게임을 하던 남편에게 처음으로 “미안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 남편의 섭섭함 마음이 녹아내리기라도 한 듯 웃으며 퉁명스럽게 “알겠어”라고 대답했다. 부끄럽게도 사과를 처음 한 날, 이 전엔 알지 못했던 비밀 같은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여전히 사과하는 것은 서툴지만 한번, 두 번 용기 내어 꺼낸 “미안해”라는 말은 나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었다. 그 말속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느꼈다. 사과할 수 있는 용기는 곧 나 자신의 행동이나 말을 먼저 생각해보는 시간과 동시에 누구의 잘잘못을 먼저 따지던 어쩌면 유치한 모습을 점차 사라지게 했다. 가장 큰 변화는 나의 상한 기분에만 묶여 있었던 모습에서 ‘이 사람도 섭섭하고 답답할 수 있었겠다’라고 이해하게 된 것도 같았다. 여전히 다툼도 사과도 모두 어렵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나에게 용기와 배려, 상대방을 향한 깊은 사랑, 그 이후의 변화하려는 모습은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책 속에 '애벌레'의 모습은 마치 익숙함과 편안함, 반복된 일상, 넓게 바라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 얕은 식견이나 환경과 사람에 의지하는 모습, 막연한 꿈을 이루는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지금도 수많은 애벌레와 같은 생각과 도전 속에 두려움, 불안과 일상을 함께한다. 넘어져도 다시 커다란 기둥으로 오르고 올라 애벌레의 다리가 마치 다 닳아 지쳐있는 이웃의 모습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책을 읽으며 과거와 현재의 나의 모습이 그림책과 같이 그려졌고, 나도 여전히 애벌레의 커다란 기둥으로 오르고 있진 않을까 생각했다.
나비가 된다는 것은 번데기의 역경의 과정을 넘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한 나비는 세상의 곳곳에 꽃이 피어나게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나비가 된다는 것은 현재와 같은 시대에 가장 필요한 깨달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대의를 위한 희생과 고통보다는 나의 편안과 안위가 먼저인 나에게 솔직하게 질문은 해본다. '나는 진정 나비가 되고 싶은가'라고.
가끔은 많은 생각이 행동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책은 나에게 지나친 고민보다 "그래 해보자! 나비가 되어 곳곳에서 꽃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도록"이라는 용기의 씨앗을 심어준 고마운 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