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sns를 해야 해?
오랜만에 3명이 모였다. 나이는 49살, 45살, 44살 아줌마들이다. 얼마 전까지는 이슈가 애들 교육에 관련된 얘기들이었는데, 아이들이 고등학교 간 이후 교육 관련 얘기는 금기어다. 단지 몇 시까지 떠들 수 있고 출발해야 한다 정도이지 어느 학원 픽업이냐 거긴 어떻냐의 말들은 마음속에서만 잠자리처럼 빙빙 돌아 댄다. 나이는 차이가 나도 네이비색상과 두꺼운 옥스포드면 느낌의 여자들이다. 커오며 하지 말라는 짓 해본 적 없고, 하라는 건 꿀꺽꿀꺽 넘켜왔고, 좋고 싫음보다는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세상을 나눠 살아온 재미없는 여자들. 생뚱맞게 6년 전에 만나서 마음 키높이 같은 친구가 되었다.
한 명은 국내 IT 대기업에 다니다 몇 년 전에 그만뒀다. 큰 회사에 멋있게 다니고 있던 터라 버티는 고충보다는 또각거리는 구두가 부러웠고, 내가 사고 또 사는 뭉그런 바지가 아니라 선명한 선을 가진 옷을 입어 참 반짝였다. 대가 없는 곳은 이 세상이 아니니까. IT업종의 젊은 동료들 사이에서 마음고생이 심했고, 결국 사표를 선택한 친구는 뒤늦게 워킹맘에서 전업맘으로 캐릭터 변경 후 몇 년 바짝 교육열을 올려왔다. 올해의 목표가 세워지듯 경영계획 같은 교육플랜이 만들어졌고 아이와 함께 이리저리 많이도 흔들렸다. 똘똘한 친구는 이제 명확히 안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뜨신 밥과 빌어주는 마음뿐이라는 것을.
다른 한 명도 마음대로 그만두지 못할 준공무원 같은 금융기관에 재직 중이다. 꽤 높은 직급과 지금까지 한 번도 이직한 적 없는 커리어는 그만두고 싶은 친구를 더 단단히 묶어주는 초강력접착제일 뿐이다. 들인 시간이 아깝고 월급이 아까워 그만두지 못하지만, 그만두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하루 10번씩은 하는 캐릭터다. 다들 알겠지만 원래 회사 그만둔다고 노래 부르는 사람이, 헤어진다고 말 가득하는 사람이 겁 많아 못한다. 특히나 여름생인 친구는 죽는 그 순간까지 바빠야 살아있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에, 회사를 다니던 말던 죽도록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라며 슬쩍 사주해석을 건네본다. 그만둔다는 말도 최선을 다해 바쁘게 뱉고 있느라 못 듣고 싶은 것 같다.
너는 왜 글을 쓰기 시작했어?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가 와닿을 쯤이, 나는 마흔이었던 것 같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서른쯤에 그리 철이 많이 들었으니 이런 노래가 나왔겠지만, 나는 애들이 학교 가기 시작하고 내가 보톡스 안 맞으면 미간 주름이 깊이 잡히는 나이가 되면서 와닿았다. 마흔이 되면서 불혹이라는 말에 충실하게, 남의 말이 안 들렸다. 바꿔 말하자면 남의 말이 안 들리니 유혹에 흔들릴 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불혹의 정의라고 생각한다 나는. 남의 말이 안 들린다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큰 맹점이지만, 나를 온전히 알아가는 두 번째 기회가 온 것이라 해석한다. 남의 평가와 시선이 까끌거리지 않아야 내 목소리가 비로소 들리기 때문이다. 처음 기회는 연애를 하면서 상대를 통해 나라는 인간에 대해 알았고, 마흔 넘어서 처음으로 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구나.
내 목소리가 들리다 보니, 많은 문제가 생겼다. '괜찮은 척' 했던 것들을 솔직한 내 목소리로 말하고 행동하자 그동안 참아왔던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잔뜩 발생했다. 처음은 친정 부모님이었다. 누가 봐도 대한민국 대표로 뽑아 손색 없는 K장녀로 살아온 40년을, 모두 헤집어 없앨 요량으로 통제성 강하신 친정 부모님에게 벗어나려 발버둥 쳤고 결국 긴급사항 아니면 연락을 안 하는 사이가 되었다.
복날에 수박 드시라며 시댁 문 앞에 나도 못 먹는 7만 원짜리를 새벽배송시키던 며느리였다. 어느 날 시댁의 감정쓰레기통이 된 내 존재를 깨달으며, 관계가 잘못되어 있음을 알고 더 이상 나는 시댁에 안 간다. 변하지 않을 시부모님이 쓰시는 언어를 언제인가 귀등으로 흘릴 수 있는, 그날이 되어야 나는 갈 수 있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열심히 하면 좋아하실 줄 알았고, 잘하면 예뻐해 주실 줄 알았던 나의 착시였다.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원망하고 싶은 남편의 잘못도 아니고, 매주 전화하고 와야 한다 생각하는 시부모님의 잘못도 아니다. 시부모님은 그런 세상에 사셨기에 내가 그분들의 가치관에 빨간 오답 표시할 권리는 없다. 그걸 다 '네네' 하면서 괜찮다 반응을 전달했던 나의 잘못이었고, 그것이 남편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 착각한 나의 어리석음이었다.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은 왕래를 당분간 중단하는 것 뿐이라, 남편과 아이들을 종종 시댁에 보내며 재미있게 놀다 오라 손 흔들어 주는 게 내 최선이다.
이제 나는 혼자인가
건강검진을 남편과 함께 받으니 제3의 보호자 연락처가 필요했지만,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 없다. 친정 엄마도 동생도 시부모님도 형님도 없고... 혼자다. 무서운데 그들과의 원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직은 더 무섭다. 얼굴을 맞은 적이 없는데 그 앞에 있다 오면 얼굴이 멍든 것처럼 아팠기에, 아직 외로움이 안전하다. 글을 쓰기 시작한 무렵이 이때쯤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고립되면 외롭고 병들 수밖에 없고, 나는 내게 벅차다고 인연을 끊어대기만 하다가는 고립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가 온전히 나로 보여도 못났다고 비난하지 않고 잘 보이려 척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났다. 그것이 이 공간의 탄생 신화다. 왜 나는 온전히 나로 태어났는데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에서 나스럽게 사는 것이 힘들까 싶었다. 어느 책에서 읽은 글은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이 공간을 아끼고 만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많은 외로움을 견뎌 내야 하고,
그게 어른이 되는 독립 과정이다.
인생은 원래 두려운 것이다.
그러니 외로운 당신
충분히 잘하고 있다.
내가 어른이 되느라 외롭고 무서웠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초등학생들이 어른이 되고 싶어 까치발 하는 마냥 으쓱되며 외로움을 버텨내려 덤볐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은 첨벙 담근 발끝에 잠시 머물고 돌부리 빙글 돌아 흘러가는 냇물이다. 내가 외로움을 버티는데 머물러 줄 힘이 필요했고, 지지를 얻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눈곱 떼지 않고 만나도 되는 인연들과 만나고 소통하고 마음 써 응원하고 눈물 흘리기도 한다. 내 하소연을 하면서 밥사고 술사며 상대의 기분을 살피지 않아도 되고, 내 마음이 소문날까 밤에 누워 다시는 이런 말 안 하겠다는 다짐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
한 친구는 이제 SNS를 시작하려 용기 내려하는데 얼굴을 공개해야 하는지 마는지, 본인의 일상이 재미있어 보일지, 편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악성댓글이 달리면 어떨지 고민이 푸르르다. 내가 대단한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 뼘 앞섰다는 이유로 고민하는 얼굴에 에너지를 불어넣을 차례다.
나는말야 남은 인생을 외롭지 않게 살기 위해 많은 관계를 잘 유지하며 살지만, 욕심처럼 안될 때가 많은 것 같고 그게 겁나서 원하지 않는 관계도 소중한 척 살아가야 하는 것 같아. 그런데 꼭 오프라인의 관계만 내 인생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고, 온라인에서 만난 많은 인연이 내 인생의 벽보에 한 마디씩 인사를 남겨준다면 그것 또한 내가 나이가 80살이 되어서도 나는 썩 괜찮은 사람이라 스스로 믿을 수 있는 힘이라 생각해. 그리고 내가 나이가 90살이어도 생각이 50살이면 온라인의 공간에서 난 50살로 살아갈 수 있거든. 몸도 생각도 나이가 있고 그건 태어나는 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가 지금 한 시간이 결정한다고 믿어.
파랗게 고민하지 말고,
빨간색으로 쭉 그어봐.
그럼 그게 썩 멋진 시작이야.
사진 : 개인촬영, @unsplash, @can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