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잘했어? 얼른 가서 씻고 자자.
밤 10시, 중1인 딸아이를 픽업해서 집으로 가고 있다. 올해 초에 이사 나와서 떠난 동네지만, 아이는 그 동네 태권도 수업을 여전히 애정한다. 태권도, 필라테스, 미술 만들기 수업을 중1이 듣는 것도 신기한데, 심지어 왕복 40분 거리를 이동해서 다니고 있다. 라이드 하러 간다면 대치동 가는 줄 아는 지인들에게는, 아이만큼이나 애 엄마(=나)가 더 신기할 것 같다. 하지만 이사 가는 것은 어른들의 결정이었고, 결정에 따라 준 딸아이의 애정하는 공간들이니 나는 말없이 실어 날라야 할 책임을 느꼈다. 오가는 것이 피곤하고 새로운 동네에 정을 붙이면 언젠가는 스스로 안 간다고 하겠지 싶은 마음으로 3개의 계절이 지나고 있다. 낯선 곳에서 얻었던 긴장감을 고향 같은 곳에서 힐링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내 마음에 드는 단어들로 바라본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는 중요한 질문 말고는 말 안 걸려 노력한다. 아이는 핸드폰을 보거나 멍하니 쉬고 있다가 가끔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나는 끄덕이는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을 99가지는 삼켜낸다. 배고프냐는 현실적인 질문에 딸아이가 갑자기 자기가 지금 먹는 것이 낫겠냐고 묻는다.
나 : 네가 배 고프면 먹는 거지.
딸 : 애들은 배고파도 살찔까 봐 안 먹는대요. 근데 저는 계속 먹어도 돼요?
나 : 아직 덜 컸쟈나. 키 크고 싶으면 잘 먹어야 할걸.
딸아이는 3.4kg으로 10개월을 며칠 넘겨 작지 않게 태어난 아이였다. 하지만 언제나 더 먹으려고 동생들과 신경전 벌렸던 나로서는, 조리원에서도 내 앞길을 상상조차 못 했다. 100미리 넘는 분유를 꿀떡꿀떡 마시는 옆 아기들과 달리 딸아이는 30미리가 끝이었다. 뛰어다닐 쯤에는 한 겨울에 도시락 싸서 집 밖에 나가 놀게 하며 한 숟가락씩 먹였다. 알겠지만 안 먹는 아이들은 입에 넣어줘도 침으로 사탕 녹이듯 밥을 물고만 있다. 뛰게 하다 보면 숨 쉬려 밥을 삼키니, 잡기 놀이를 하며 그렇게 하루 3 끼니를 한 끼에 2시간씩 먹였다. 언제나 소아과에서는 몸무게 미달, 키 미달. 일 할 때 결과를 평가받음에 무서움이 없었는데, 소아과에서 받는 성적표는 무서웠다. 그 부족한 수치들은 스스로 모성애 부족한 엄마라고 자책하기에 썩 유용했다.
딸아이는 8살 때 미국에서 2년 거주할 때도 맥도날드 한 번을 먹은 적이 없다. 흰밥에 한식 반찬을 먹겠다고 하여 모든 학교 가는 도시락에 냄새 덜난 한식으로 엄선해서 준비해야 했다. 그래도 6시간씩 밥 먹였었던 나는, 아이가 먹어주기만 하면 감사한 마음이었다. 심지어 미국 내에서 여행 다닐 때도 우리는 차에 쿠쿠밥솥을 실었어야 하다 보니 비행기보다는 18시간 운전을 택했다. 운전으로 아팠던 허리가 아직 생생해서 추억이라는 멋들어진 단어는 못 붙이겠다.
빵은 텁텁한 플레인을 좋아하고, 고기는 닭가슴살을 최애부위로 뽑고,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음료를 고르면 우리 집 냉장고에도 가득한 보리차를 돈 주고 사 먹는다. 이런 딸아이가 4학년 때 전교에서 가장 작은 아이가 되면서, 마음이 불편했었나 보다. 애써 스스로 먹기 시작했고 키 크도록 운동하겠다 하여 태권도와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눈에 튀는 것을 싫어하다 보니 전교 가장 작은 아이의 타이틀을 벗는 것이 딸아이의 목표였다. 솔직히 내가 키가 많이 크다 보니, 아이가 꼭 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이 불편하지 않으면 크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딸아이 본인이 학교에서 가장 작은 게 불편했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올초 중학교 입학식, 내 눈에는 아이들 키 밖에 안보였다. 모인 엄마들 중에 내가 젤 큰데, 내 딸이 젤 작을까 봐 조바심 내는 웃픈 상황이다. 6학년 때 좀 크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가장 작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참석했다. 생각보다 작지 않았고, 마침 더 작은 아이가 옆자리에 앉아 있어 새삼 커 보였다. 급히 목 빠져라 궁금해하는 남편에게 '젤 작지 않아'라고 카톡을 보내고 그날의 미션은 끝난 듯 입학식 내내 아픈 다리만 감당하면 되었다.
딸 : 근데 엄마. 키 작은 게 귀여운 것 같아서, 저 키 많이 안 커도 될 것 같아요.
나 : 엥? 생각이 바뀐 거야? 너 계속 크고 싶어 했쟈나?
딸 : A가 작으니까 다들 귀여워하거든요. 저도 작았을 때 애들이 다 귀여워했었는데 이제 안 그래요. 작아서 귀여운 게 좋은 것 같아요. ( A는 입학식 때 딸 옆에 앉았던 더 작은 친구이다)
나 : 그럼 너 90살 할머니가 되었을 때도 키가 작으면 앙증맞고 귀여워 보일 것 같아?
딸 : 아뇨 할머니가 왜 귀여워요.
나 : 지금만 귀여운 게 좋아 보이는 거 아닐까. 너보다 몇 살 밖에 안 많은 고등학생 언니들 봐바. 마냥 앙증맞고 귀엽지는 않을걸? 그것 때문에 일부러 안 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키가 커서 얻는 좋은 점도 많을 수 있어~
엄마는 말이야. 살면서 다양한 기준을 갖고 선택하지만, 그중에 지금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이
지금 밖에 안 되는 것이 어떤 것일까?
라는 거야. 그 기준은 꽤 유용했고, 지금도 반반인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때 도움이 돼. 스무 살이 되어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대학생일 때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그중에 하나가 여행이었어. 취직하면 휴가 때나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 여행이 대학생 때 아니면 못할 것이라 판단한 거지. 학교 산악동아리에 들어가서, 우리나라 높은 산들은 다 다닌 것 같아. 돈이 부족하니 제주도에 배 타고 가서, 한라산 꼭대기는 물론 14박을 우르르 걸어 다니며 여행했고 전국 각지에 동아리 선배들을 찾아가서 든든한 한 끼를 얻어먹곤 했어. 엄마는 그 추억이 정말 크고, 지금도 겁 없이 산에 오를 수 있는 경험도 쌓인 것 같아. 사실 그때 공부는 많이 안 했어. 공부는 그때 아니면 못하는 대상에 들지 못했거든. 물론 그때 공부 열심히 해서 취직 잘 한 엄마 친구들도 있지. 44살에 만나서 얘기해 보면 다시 돌아가더라도 엄마처럼 여행 다니겠다고 아쉬워하는 친구들이 많아. 엄마는 아직도 그 선택에 후회가 없고.
아빠 만나서 결혼할 때는 열심히 나한테 맞는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집중을 했었고, 고민도 깊이 했어. 또 얼마 전까지는 이사에 집중했지. 네가 중학교 가기 전에 꼭 했어야 한다고 판단했으니까. 요즘에 엄마가 러닝을 시작했쟈나? 그것도 50살이 되기 전에 10km 마라톤을 나가지 않으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거야. 엄마도 많이 미루지만, 지금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우선 시작해 보려 해.
네가 살아가면서 생각해봤으면 하는 기준은, 지금이 지나면 못하는 것을 놓치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야. 예를 들면 키 크는 것도 그중에 하나겠지. 다이어트는 아마 죽는 순간까지 하게 될 거야. 평생 살찌지 않고 건강하게 먹고 운동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을 거야. 그런데 문제는 키는 지금 아니면 못 커. 죽는 그 순간까지 지금 큰 키로 살아가야 하거든. 네가 친구들과 떡볶이 먹고 인생네컷 찍는 것도, 지금 너 나이에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일 거야. 별거 안 해도 같이 있으면 너무 웃기고 재미있는 친구들과의 시간은, 나중에 미뤘다가 어른되서 만들어 내기는 쉽지 않을 거야.
반대로, 지금 밖에 안되는데 영원히 될 것처럼 착시를 만드는 것들도 있어. 예를 들어 키가 작으면 귀여워 보인다는 것이 착시 같은데. 당장 중학생 때는 평생 귀엽게 느껴질 것 같지만, 몇 년만 지나도 작으니까 귀엽다는 기준은 변할 수 있거든.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작은 키에 호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건 키가 작아서 보다는 실제 예뻐서라고 바라보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싶어. 이런 건 지금 밖에 안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만 느끼는 생각인거지.
엄마는 오늘도 오늘 밖에 안 되는 일에 집중하려 하고, 44살이 지나면 하기 힘든 일을 지금 해내려 노력해. 인간은 시간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을 빼고 목표를 잡는 건 그리 유익하지 않다고 봐. 물론 어제저녁에 엄마가 아빠랑 먹은 치맥도 어제의 즐거움으로 남기고 싶어서 마셨다고 핑계 댈 수는 있어.
살아가는데 많은 착각과 시선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너의 발목을 이리저리 끌겠지만, 끌려 다니는 게 인생이고 고민하는 게 성장이야. 흔들렸어도 다시 돌아와 걸으면 되고, 멈추지만 않으면 돼. 어찌 보면 고민이 쌓인 시간을 우리는 하루라는 이름으로 부르는지도 몰라. 지금 밖에 못하는 고민을 해보고, 지금 해야 의미 있을 선택을 하길 바라!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사춘기 딸 앞에서 입에 힘을 꽉 주고 두 입술을 붙인다. 내 딸한테 내 경험을 삼키게 해서 시행착오를 줄이게 하려 하는 것이야 말로 큰 착각인 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부모세대들이 했던 착각, 내 실수를 반복하게 하지 않으리라. 지금 이 순간도 내가 잘만 알려주면 딸아이 인생이 지름길로만 갈 것이란 착각에 허우적대지만, 모든 에너지를 다해 두 입술을 꾸덕하게 붙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