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시간 07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축복과 저주'에 대한 모든 사람의 반응은 동일하다.
저주에 대해서는 한사코 피하지만, 들어오는 축복은 두 팔을 벌려 환영한다. 그래서 가정이나 종교 건물, 심지어는 상가 건물 안에도 축복을 기원하는 문구나 그림이 걸려 있다. 인사를 나눌 때에도 헤어질 때에도 서로 축복을 기원한다. 하지만 그런 소망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저주 아래 살아간다. 이런 결과가 주어지는 원인이 무엇일까?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반대로 생각하고, 그 잘못된 생각에 따른 생활 방식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6장은 예수님의 '평지 수훈'을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첫머리에 '축복과 저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그분의 말씀은 인류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였던 헬라인들, 그래서 현대인들과 동일한 정서를 지녔던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이런 사람에게 축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그리고 버림받은 자. 그에 반해 부유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받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화복관'은 당시 사람이나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뒤바뀐 개념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심층적인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의문이 풀린다.
'축복 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가난한 자'는 헬라어에서 구걸해야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빈궁에 처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의 가난이 특별히 '심령'에 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마 5:3), 그는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무조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주린 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다. '우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해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는 사람이다. '버림받은 자'는 진리를 말하고 진리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는 분이시다. 먼저 달려가 따뜻하게 품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들이 축복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주 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앞서 소개한 네 종류의 사람과 정확히 대구를 이루고 있다.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 의'를 추구한다. 쾌락에 웃고, 안전하고 잘하고 있다는 거짓말에 속으면서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도 방법이 없다. 방법이 있다면, 정의로우신 그분의 성품에 따라 그러한 죄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평지 수훈의 시작부터 이것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는, 그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교훈을 통해 우리가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