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 에스라와 함께하는 산책의 시간 07
에스라서 7장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원전 45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두 번째 사건, 즉 2차 포로 귀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2차 귀환을 주도한 사람은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였다.
그가 돌아온 목적은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 임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는 것(14절). 둘째, 하나님의 전(성전)을 위하여 (제사로) 섬기는 것(17-20절). 셋째,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25절).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겠다고 결심하였다(10절). 그 가운데 ‘율법 연구’에 대한 그의 결심은, 오늘날 그것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호와의 율법’은 기본적으로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는 이것뿐만 아니라 ‘시가서’를 비롯하여, 이전에 쓰여진 ‘역사서’와 ‘예언서’ 일부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지만, 자신의 익숙함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연구를 결심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런 에스라와 비교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많은 경우, 그보다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데 얼마나 게으른지 모른다. 연구는커녕 읽는 것도 소홀히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문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연구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에스라가 결심한 그다음 내용인,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다. 아니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명령의 전제가 되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과 ‘여호와의 율법’은 다른 것일까?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말씀과 단절되어 있지 않다. 그분은 그것을 단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전하게 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거짓이고 자기기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이, 그 편지를 소홀히 다룰 수 있을까? 곁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을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 또 그가 당부하는 말도 열심히 지키려고 할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있지 않다면, 먼저 이 문제부터 자가 진단해 보아야 한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그 척도가 낮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돌아와야 한다.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말씀을 읽고 상고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성경 공부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