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 에스라와 함께하는 산책의 시간 09
통혼(通婚)이 가증한 이유통혼(通婚)이 가증한 이유
에스라서 9장에는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아 있는 학사 에스라의 모습이 나온다.
그는 방백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더구나 백성들의 지도자인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죄를 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 소식을 들은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주저앉아 버렸다.
에스라의 이런 반응 속에는 이방인과의 결혼, 즉 ‘통혼’이 그만큼 심각한 죄라는 반증이 들어 있다. 왜 그럴까? 통혼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가증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실 때 ‘혐오스럽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원래 고대 우가리트어(Ugaritic語)에서 ‘성전에서 일어난 잘못된 행위나 말’을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기시되는 사실’(taboo)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통혼은 왜 가증한 일이 되는 것일까? 거룩한 자손이 부정한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되기 때문이다. 서로 섞이게 되면 거룩한 자손은 부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통혼을 금지하셨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결혼은 당사자인 두 사람이 결정하는 문제로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결혼 이후에 전개될 삶의 방향, 즉 신앙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결혼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가증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통혼이 가증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많은 사람은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결혼 당사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눈에 좋게(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한다. 이러한 생각과 선택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까?
두 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첫째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관자가 되신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주재권도 하나님께 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인간들이 그 주재권을 빼앗아 자기 스스로 결혼에 대한 주재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 가증하게 비치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눈이 아닌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였다는 점이다.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배우자를 결정하는 문제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배척하는 행위가 들어 있다. 그래서 통혼이 가증한 것이다.
사람들은 결혼 문제를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통혼이 지닌 파괴적인 성격을 우리의 전인격적인 삶과 연결하여 총체적으로 규명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에스라는 통혼을 우리의 모든 삶이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서로 섞이는 것으로 보았다. 즉 결혼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신앙이 농축되어 있는데, 그 결혼이 통혼이 됨으로써 그 사람의 삶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신만 믿는 죄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통혼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진노와 멸망을 향하여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그 문제들 가운데 결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결혼을 비롯하여 삶의 모든 문제에서 주재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인생의 행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