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부터 서구열강들은 그들의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워 유럽 이외의 지역을 식민화했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국가들의 팽창으로 세계는 제국주의적 경제체제가 지배했다. 제국주의는 문명의 기준을 유럽으로 단정하고, 유럽 이외 국가는 문명화시켜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문명화의 정도는 서구의 종교와 군사력, 경제 시스템이 기준이 되었다. 아시아의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은 서구화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증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아직도 서구문명은 문명화의 척도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것은 부의 축적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현재는 제국주의를 주도하던 유럽은 주도권을 미국과 중국에 빼앗겨 버렸고, 중국의 경제적 성장으로 세계 경제의 주도권도 누가 잡을지 알 수 없는 시대다. 일부 사람들은 유럽이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환경문제와 인권을 강조하며 ESG라는 개념을 제시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ESG가 산업발전이 가져온 기후문제와 이윤추구 중심의 자본주의, 인권의 향상 등의 문제로 촉발되었으니 서유럽에서 시작되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문화와 경제력, 그리고 군사력에서 세계열강과 어깨를 겨루고 있는 우리나라가 아직도 서유럽의 기준을 쫓아가야 하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ESG에 관련된 규정은 대부분 유럽연합에서 결정한다. 유럽과 거래하길 원하는 국가는 그 규정을 따라야만 한다. 수출이 중심인 우리나라도 주요 수출국, 특히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 등의 ESG와 관련된 각종 규정과 제도 발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ESG가 주목받기 시작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기후위기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또한 유럽과 미국의 직간접 지원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전쟁은 대규모 인명 살상과 자연 파괴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의 빈부 격차도 심해지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에 적극적이었던 유럽도 예상과 다른 결과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이 오로지 '이윤'이었던 시대에서, 이윤 이외에도 윤리적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제 경제체제에 반영된 것은 인류사의 진일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기업활동에 제재가 되는 ESG 경영을 반대하는 주장도 강하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평가에 비재무적 평가를 투자의 지표로 삼는 것이 타당하지 않고 ESG가 아니라도 기업의 탈탄소화, 기업지배구조 개선,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논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글로벌 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ESG가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고, 실제로 미국 기업의 지속가능 투자 규모 증가가 미국 이외의 국가보다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도 ESG에 대한 부정적이거나 아예 무시하는 기류가 느껴진다. 특히 대기업도 아닌, 첨단 산업도 아닌 패션분야에서 ESG에 대한 논의는 더욱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진다. 의류 폐기 금지 조항을 해결하기 위한 논의도 누구를 위해서, 누가 중심이 되어 실행해야 하는지도 분간이 안된다. 정부의 정책이 정해지면 일단 따르고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생각하면 일단 ESG에 관련된 정부 정책이 발표되면 변화가 있을 것도 같은데 정부는 어떤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으면 그다지 관심 없는 우리네 속성도 한몫하여 환경이나 인권문제도 이제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고 더불어 패션산업의 ESG 상황도 답보상태다.
패션산업은 문명이 시작하면서 줄곧 있었다. 미래도 패션산업은 계속될 것이다. 유럽이 글로벌 주도권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ESG를 하건 말건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후위기와 인권과 공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패션산업의 ESG도 해외 수출과 상관없이 우리의 기준을 만들고 발전시켜야 한다. 요즘 국내 패션산업의 매출을 보면 우리나라의 유력한 패션기업조차 존폐의 위기가 느껴진다. 이 상황에 기후위기가 대수며 ESG는 어따 쓰겠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는 어쩔 것인가?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패션산업의 ESG는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망령처럼 구천을 떠돌아다니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