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삶의 진실을 배우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앞에 섰다. 추모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무려 축구장 세 개를 합친 공간에 2711개의 비석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입구에는 허리춤에 오던 비석이 안으로 걸어갈수록 점점 높아졌다. 성인 두 명의 키를 훌쩍 넘는 곳은 사방이 막힌 빌딩 숲처럼 갑갑했다. 바닥도 굴곡이 져서 넘어질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옥수수밭인 듯,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인 듯, 당시 유대인들이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아주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엄마, 여기 있는 비석들, 무덤처럼 쓸쓸하고 슬퍼.”
“엄마도 그래. 독일은 자기들이 저지른 잘못을 도시 한가운데 세워 놨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양손을 번쩍 들고 벌받고 있어. 제 얼굴에 침 뱉는 용기라니, 뭔가 뭉클하다.”
비석들을 가로지르자 지하 추모관이 보였다. 직원이 줄 서서 기다리는 우릴 막아서며 말했다.
“추모관에 있는 사진은 잔인합니다. 아이들이 놀랄 수도 있어요. 다시 생각해 보세요.”
아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서워도 마주해야 했다. 비극적인 역사에 서린 잔인함과 연약함이 주는 울림은 가장 의미있는 배움이 될 테니 말이다. 지하 전시관으로 내려갔다. 입구에 새겨진 글귀는 추모의 이유를 선명하게 밝혀 주었다.
“일어났고,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핵심이다.”
이곳에는 총 네 개의 전시실이 있었다. 첫 번째는 ‘크기의 방’인데 하얀 벽에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사진과 연도로 드러냈다.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분노, 경제대공황의 절망, 성공한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증오 그리고 ‘열등한 민족을 말살해야 한다’는 혐오와 광신이 600만명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사진은 생각보다 더 적나라했다. 나체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유대인들, 산처럼 쌓인 신발과 옷가지, 널려있는 시체 더미, 잔혹했던 가스실과 독가스 트럭의 모습, 앙상하게 마른 몸들과 공허한 눈빛의 포로들까지.
“엄마, 사진들이 너무 잔인해. 이런 끔찍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안네의 일기>를 읽으며 상상한 것보다 훨씬 잔인해.”
“그러니까 말이야. 보고도 믿을 수 없네. 인간은 인간에게 대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바닥에 편지와 노트가 있는 캄캄한 방에 들어갔다. 유대인의 글은 증거 인멸을 위해 나치당이 대부분 없앴지만 소수의 일부 기록이 이렇게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소환장을 받고 두려워하는 마음, 가스실에서 엄마 젖을 빨다가 죽은 아기, 죽어가는 이들을 보는 남은 이의 고통, 가족에게 보낸 두려움과 사랑의 고백들이었다. 다음은 유대인인 한 <어머니의 편지>이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미셸과 떨어지지 마라. 포레트에게도 편지를 써 보렴. 어쩌면 하나님께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실지도 모르니. 우리는 내일 떠난단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엄마는 지금 눈물을 흘리며 너희에게 포옹을 보내고 있어. 내 가엾은 아이들아. 나는 너희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너희들을 다시 꼭 안아보고 싶구나.
글 속에 스민 체념과 절망, 아이들을 향한 어미의 애달픔은 감히 상상도 못할 크기였다.
두 번째 ‘가족의 방’에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전 찍었던 유대인들의 사진이 있었다. 평화로운 가족 식사 풍경, 데이트 중인 연인, 결혼식장의 화목한 사진 등, 이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행복했다. 하지만 이송 명령서와 수용소 이동으로 이 모든 일상은 스러지고 말았다.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이름의 방’이었다. 어두운 공간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이름과 짧은 생애가 낭송되었다. ‘엘리자베트 로젠탈, 1925년 오스트리아 출생, 1943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 수용소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이름을 잃고 단지 번호로 불렸다. 이곳은 잃어버린 그들의 이름을 다시 찾아주는 공간이라고 했다. 여기서 600만 명의 이름을 다 부르려면 6년 7개월 그리고 27일이 걸린다니, 희생자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이 됐다.
마지막은 ‘장소의 방’이었다. 유럽 전역의 수용소, 게토, 학살지의 영상과 사진이 어두운 벽면 위로 흘렀다. 파리, 로마,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아테네까지, 홀로코스트가 이렇게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었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특히 폴란드에는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등 절멸 수용소가 많았고, 우크라이나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는 총살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착찹하고 화나며 놀란 마음을 다독이며 방명록에 메모를 남겼다. 무언가 울컥한 채로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왔다. 햇빛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밝았고 사람들은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음속 울림을 잊지 않으려 나 자신에게 물었고, 이를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으로 남겼다.
"내가 그 시절 유대인이었다면, 병든 몸을 이끌고 가스실을 피할 수 있었을까?
히틀러와 괴벨스의 라디오 연설을 매일 들으며 살았다면, 나는 세뇌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독일 공무원으로서 책상 위에 유대인 명단이 놓였다면, 과연 그것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정답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그 시대의 누구도 처음부터 괴물이나 시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하루를 살아내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계획하고, 예측하고, 결정하면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 여긴다. 그러나 역사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고 무력한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역사의 상처를 마주하고 기억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자신에게 늘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지금 생명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숫자와 체제, 이념만을 보고 있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누리는 아이들의 웃음, 마주 잡은 손, 담백하고 삼삼한 소세지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순간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오늘을 겸손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뿐이다. 그 이상은 나도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가방엔 햇반, 마음엔 괴테> 연재가 열 편 이내로 남았습니다. 30편의 글이 다 채워져서 <가방엔 햇반, 마음엔 괴테2>라는 다른 브런치 북에 연재하겠습니다. 꾸준히 구독해주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가족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복된 한가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