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츨라프 광장에서 광화문 광장을 느끼다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대형 마트로 향했다. 구시가지를 벗어나 조금 걸었더니 유명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쇼핑 거리가 나왔고, 전면에 ‘바츨라프 광장’이 펼쳐졌다. 이곳은 1300년대에 조성된 750미터 길이의 광장이다. 체코를 카톨릭 정신으로 다스렸던 바츨라프 1세에서 이름이 비롯되었고, 광장 끝에는 그의 말 탄 동상과 할머니인 성 루드밀라의 동상이 서 있었다.
“여긴 1300년대에 조성됐는데, ‘구시가지’보다 400년 뒤에 만들어져서 ‘신시가지’라 불려.”
남편의 설명에 따라 광장을 쭉 둘러보았다. 웅장한 국립박물관, 아르누보 양식의 호텔 유로파 그리고 민주화를 외쳤던 메라닉 빌딩이 보였다. 그러나 이곳의 진짜 의미는 화려한 건물 너머에 있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는 비폭항쟁이 치러졌으며, 1989년 ‘벨벳 혁명’의 함성이 울렸던 자리이다. 역사와 자부심이 배인 체코 현대사의 심장인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프라하의 봄’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공산주의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었다. 체코의 젊은이들은 ‘둡체크’가 내세운 ‘인간적인 사회주의’에 희망을 품었다.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자 광장에는 음악과 토론이 가득했다. 바츨라프 광장은 더 많은 민주적 권리를 요구하는 자발적인 항쟁의 무대가 되었다.
대학생 얀 팔라흐가 이곳에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분신했고, 사십 일 뒤 또 다른 학생 얀 자이크도 몸을 불꽃에 던졌다. 그들은 무기 대신 꽃과 노래, 그리고 희생으로 자유를 외쳤다. 그러나 그 뜨거운 공기는 곧 탱크 바퀴에 짓밟혔고,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려 20년 동안 점령하며 민주화의 숨결을 눌러버렸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의 비극을 ‘증오의 축제’라 부르며 처절하게 기록한다. 상공을 맴도는 전투기의 굉음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 위협처럼 날아드는 주먹, 무너진 건물, 피 묻은 체코 삼색기에 덮인 시신들. 체포와 감금 후 풀려나 더듬거리며 말하던 둡체크의 목소리에, 시민들은 분노보다 더 깊은 무력감 속에 떨었다. 주인공 토마시는 이렇게 회상했다.
“침공 5년이 지나자 친구들 절반은 망명했고, 남은 절반은 죽었다. 아마 그 시기는 국가 전체가 매장을 치르던 가장 치명적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소련군의 만행은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시민에게 총을 겨누는 데 그치지 않았고, 비둘기를 사격 연습 삼아 쏘아 죽이고, 개들을 모조리 무참히 사살했다. 공포를 심어 공산 체제를 공고히 하려 한 것이다. 또 유명 작가와 언론인을 회유해 ‘소련과 공산주의’를 찬양하게 했다. 자유를 노래하던 펜은 검열에 꺾였고, 진실을 외치던 목소리는 체제의 선전에 이용되었다. 쿤데라는 이렇게 공포 정치가 어떻게 자유를 짓밟고, 개인과 민족의 영혼을 무너뜨리는지를 생생히 그려냈다.
체코의 역사를 떠올리자 대한민국이 겹쳐졌다. 체코가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지배를 받았고 소련의 공산화를 겪었듯, 한국도 중국의 압박과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수난을 겪어왔다. 체코인들이 마리오네트 인형의 가벼운 팔과 다리를 통해 체코어를 지켰듯, 한국도 야학과 조선어학회를 통해 민족의 말을 지켜냈다. 공산주의에 항거했던 ‘프라하의 봄’은 한국의 1960년대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세워진 독재 정권은 청년들의 가슴을 짓눌렀고, 수많은 이들이 끌려가 무참히 고문했다.
그러나 1989년, 바츨라프 광장은 다시 거대한 강물처럼 출렁였다. 수십만 시민이 모여 촛불처럼 손을 흔들며 민주주의를 외쳤고, 폭력 한 번 없이 친소련 정권은 무너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벨벳 혁명’이라 불렀다. 극작가였던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이 되자 광장은 환호와 노래로 가득 찼다. 한국 또한 1987년 6월 항쟁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쟁취했다. 바츨라프 광장과 광화문 광장은 폭력이 아닌 연대와 용기로 자유를 이끌어낸 거울 같은 공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아이들과 레논 벽 앞에 섰다. 이곳은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을 추모하는 공간이지만, 체코 젊은이들이 민주화를 외치기 위해 집결한 장소였다. 몰타 대사관 소유라 정부가 함부로 허물 수도 없었고, 그래서 벽에는 매일 ‘평화’, ‘희망’, ‘자유’, ‘연대’라는 단어들이 새로 덧칠되었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한국 청년들도 벽보와 대자보를 붙였어. 캠퍼스 담벼락 가득 민주화를 외치는 글이 걸렸지. 거리로 나가 곤봉과 최루탄을 맞으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단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들이 말했다.
“아, 진짜 무섭고 힘들었겠다.”
“근데 체코랑 한국, 닮은 점이 많네. 체코가 남의 나라 같지 않아.”
얘기를 나누며 하천을 따라 걸었다. 블타바(몰다우) 강이 반짝였다. 문득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몰다우’가 떠올랐다. 작은 샘이 만나 시내를 이루고, 다시 큰 강이 되어 숲과 초원을 지나 카를교 아래로 힘차게 흘렀다. 불현듯 서울의 한강이 겹쳐졌다. 두 강 모두 험난한 역사를 품었지만 끝까지 부서지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지켜낸 대견한 물살이었다.
“우리 한강도 이 강처럼 계속 흐르다 결국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네.”
내가 말하자 아이가 장난스럽게 되받았다.
“엄마, 그럼 블타바 강도 언젠가 ‘블타바의 기적’을 만들 수 있겠네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체코도 이미 기적을 이뤘어. 자동차 산업으로 경제력을 키웠고, 프라하는 지금 ‘유럽의 심장’이라고 불리잖아.”
두 나라는 떨어져 있지만 마치 강물처럼 이어져 자유와 기적이라는 같은 흐름을 만들어 냈다.
프라하와 서울, 문득 마음 속에 데칼코마니라는 단어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