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에서 다시 만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여린 감수성을 꾹꾹 누르며 입시 경쟁을 버텨내던 학창 시절, 밀란 쿤데라(1929~2023)의 소설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 마음을 깊이 울렸다. 그러나 그때는 두툼한 책 두께와 예상치 못한 성적 묘사에 놀라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펼친 이 작품은 여전히 외설성이 짙었지만, 동시에 철학적 사유가 깊이 배인 고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해한 비유와 상징 속에서 묵직하게 깔린 작가의 사색이 무척이나 진했다.
쿤데라는 체코에서 태어나, 개인의 고통과 선택, 권력과 자유, 사랑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글을 썼다. 공산 체제의 탄압을 피해 1975년 프랑스로 망명했지만 그의 작품에는 여전히 체코의 아픈 역사가 배어 있다. 그는 역사의 무게에 얽힌 인간의 욕망을 섬세하게 해부했는데, 그 욕망은 가벼움과 무거움으로 나뉜다. 육체적 만족, 이를테면 성욕이나 배설처럼 즉각적 쾌락에만 매달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삶은 ‘가벼움’으로, 사랑과 신념, 종교 같은 정신적 이상을 좇는 삶은 ‘무거움’으로 간주된다.
작품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토마시는 육체적 쾌락만 좇는 외과의사로, 책임을 회피하며 산다. 테레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정서적 폭력에 시달렸지만, 자신의 고유성을 인정받는 진짜 사랑을 꿈꿨다. 그러나 남편인 토마시의 끊임없는 외도로 고통받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소련 군대의 폭력을 세상에 알리는 사진을 찍으며 ‘무거운 삶’의 가치를 쫓는다. 반대로 사비나는 종교와 정치, 신념 같은 ‘키치(Kitsch,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미화된 현실)’를 조롱하며 자유와 쾌락을 추구한다. 마지막 인물 프란츠는 이상주의적 신념 속에 갇혀 사비나를 사랑하는 교수다. 쿤데라는 이 네 사람을 통해 인간 존재가 얼마나 가볍고도 무거운지를 드러낸다.
쿤데라는 이 작품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비틀어 말한다. 니체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사건은 무한히 반복된다”는 생각을 통해 삶의 무게와 책임을 강조했지만, 쿤데라는 정반대로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인생은 덧없고, 결국 가볍다. 불안과 두려움, 복잡한 생각이 매일의 삶을 무겁게 짓누른다 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단 한 번의 삶, 시간의 한계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생은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가.
이어 그는 ‘키치적 태도’를 비판한다. 키치(Kitsch)란 전체주의나 애국심 같은 정치적 신념, 종교적 이상, 사랑처럼 지나치게 미화되고 강요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쿤데라는 키치를 “인간의 배설물, 곧 똥을 단호히 부정하는 태도”로 표현한다. 불편한 진실과 모순, 고통을 지워버리고 모두가 감탄할 만한 감상만 남길 때, 인간의 자유와 개별성은 사라진다고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쿤데라는 한 가지 역설을 덧붙인다. 자유로운 삶은 끝내 공허함을 남기고, 육체적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토마시다. 끊임없이 쾌락을 좇던 그는 결국 테레자에게 돌아온다. 테레자는 그에게 정서적 안식처이자 어머니 같은 품이었고, 바로 그 품이 그를 다시 소련의 탄압과 정치적 위험이 도사린 프라하로 이끌었다.
개인의 삶이 그렇듯, 세상 또한 아이러니하다. 어떤 곳에서는 음식이 넘쳐 버려지고, 또 다른 곳에서는 굶주림으로 사람이 쓰러진다. 한 나라에서는 축제의 폭죽이 하늘을 수놓고, 다른 나라에서는 전쟁의 폭탄이 대지를 흔든다. 인생이 이처럼 아이러니하고 때로는 가벼워 보이지만, 정작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매달 빠져나가는 청구서, 아이의 미래를 향한 끝없는 걱정, 끝도 없는 업무와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긴장감은 늘 우리 어깨를 짓누른다. 결국 산다는 것은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애쓰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일이 아닐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얻은 통찰은 여행길에서의 깨달음과도 닮아 있었다. 수많은 인종이 뒤섞인 거리, 버스와 지하철에서 스쳐가는 파란 눈동자, 동양인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백인 할머니의 눈빛 속에서 나는 내 존재가 얼마나 가벼운지를 새삼 느꼈다. 나는 세상에서 특별히 중요한 사람이 아니며, 저마다의 가치관과 방식으로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일 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사람은 결국 쿤데라가 말한 ‘가벼운 삶’, 곧 육체적 필요와 만족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오늘의 카페라떼를 존중하고, 여행이 선물하는 자유로움도 기꺼이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받으며, 수많은 사람들 중 단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인정받는 삶, 그것이야말로 가장 축복받은 인생일 것이다. 가족 여행을 위해 세심하게 준비하고 가이드를 자처해 준 남편, 자주 티격태격하다가도 카메라 앞에서는 나름 다정한 남매로 변신해 주는 아이들. 그들에게 고마움이 절로 샘솟는다.
가족 여행의 일상 또한 결국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간다. 늦잠을 잘까, 일찍 일어나 한적한 박물관을 둘러볼까. 유튜브 쇼츠 속 도파민에 빠질까, ‘벌거벗은 세계사’ 속 지식의 바다에 잠길까. 아이들을 일찍 재울까, 활동지와 일기를 끝내게 할까. 전망대의 끝없는 계단을 올라 땀으로 시원해질까, 아니면 공원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으로 시원해질까. 매 순간이 줄다리기다. 지금 내가 걷는 바츨라프 광장 역시 마찬가지다. 장바구니에는 소시지와 빵, 라면이 가볍게 담겨 있지만, 발 디딘 곳은 얀 팔라흐의 무거운 분신터다.
인생은 본디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그래서일까? 쿤데라의 책은 여행 중 사색처럼 무겁게 읽히지만, 여행 속 웃음은 의외로 가볍고 즐겁게 터진다. 그리고 라면만큼은 언제 어디서든 변함없이, 가볍고 빠르게 후루룩 먹는 게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