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껴안고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도시
“남쪽에 가서 로맨틱 가도를 달릴까, 북쪽 베를린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갈까?”
독일 여행 루트를 짜면서 남편과 고민했었다. 우리는 결국 아이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엽서 대신 질문을, 기념사진 대신 사색을 남기기로 했다. 거리상 무리였지만, 기차를 타고 북쪽에 당도했다.
그렇게 도착한 베를린 기차역. 왠지 오래된 벽돌 건물일 것 같았는데 중앙역의 풍경은 전혀 달랐다. 투명한 유리와 강철이 겹겹이 얽혀 있어 마치 거대한 ‘우주정거장’이라고 할까. 층마다 기차 플랫폼과 지하철 입구가 이어졌고, 유리 천장을 뚫고 쏟아지는 햇빛이 중앙 홀을 환하게 밝혔다. 기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소리,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강철과 유리가 내뿜는 반짝임이 무척 활기찼다.
“엄마, 여긴 기차역이 아니라 공항 같아. 진짜 크다.”
“그러니까, 독일의 수도라더니 기차역부터 웅장하네.”
과거 베를린은 나치 정권의 심장부였던 동시에, 냉전 시기엔 동서로 갈라져 베를린 장벽이라는 상징적인 분단의 도시였다. 1989년 장벽이 무너진 후에는 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독일의 수도로서 유럽의 과학과 예술, 문화 발전을 선도하며 내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로 갔다. ‘보리수 나무 아래’라는 뜻의 이 길은 17세기 후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베를린 왕궁까지 이어지는 왕실의 행차길로 조성됐다. 길가에 보리수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했디고 했다.
베를린을 상징하는 대로는 어떤 느낌일까? 출구를 나오자 대로 주변으로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넓은 잔디밭이 펼쳐졌다. 출구 바로 앞에 있는 ‘홈볼트 포럼’은 바로크 왕궁의 품격이 묻어났다. 예전에는 왕궁이었지만 지금은 세계 문화와 현대 전시물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의 권력이 아닌 현대적인 다양성과 대화의 공간이 된 건물에서 도시가 지향하는 미래가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자 민트빛이 낭만적인 베를린 돔과, 장대한 원형 기둥이 늘어선 알테 박물관이 그림처럼 서 있었다. 현대에서 중세로, 다시 고대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 위엄과 대조적으로 눈앞의 루스트가르텐(Lust garten, 기쁨의 정원)에는 여러 쌍의 연인과 친구들이 잔디에 앉아 웃고 있었다.
조금 더 걸었더니 신전처럼 단아한 건물이 나타났다. ‘노이에 바헤’였다. 한때 왕궁을 지키던 근위병 막사였던 이곳은 이제 전쟁과 폭정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을 추모하는 공간이 되었다. 홀 중앙에는 케테 콜비츠의 청동 조각 <어머니와 죽은 아들>이 놓여 있었다. 차갑게 식은 아들의 손을 꼭 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했다. 천장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전쟁과 폭력의 상처를 더욱 고독하고 애처럽게 표현한다고 했다.
길을 따라 죽 내려갔다. 프리드리히 대왕(1712~1786)의 기마상이 나타났다. 그는 프로이센(1701년에 성립되어 1871년 독일 제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존재했던 독일 북부의 강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로, 근대 독일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국가의 첫 번째 하인’이라 부르며 왕권보다 백성과 정의를 중시한 위대한 군주였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고문을 금지했다. 또 감자를 보급해 백성을 굶주림에서 구해서 ‘감자 대왕’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그에게도 깊은 상처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군사적 규율을 숭배했던 인물로, 부드럽고 섬세한 성향의 아들을 거칠게 다뤘다. 프리드리히가 몰래 플루트를 연주하거나 프랑스 철학서를 읽었다는 이유로 호되게 질책을 했다. 열여덟 살 무렵, 그는 친구 하인스 카테와 함께 망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계획은 들통났고, 카테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프리드리히는 감옥 창살 너머에서 친구가 단두대에 서는 장면을 억지로 지켜봐야 했다. 그 이후 프리드리히는 마음을 닫고 홀로 살았다. 정치적 이유로 결혼은 했지만, 아내와는 평생 따로 살았기에 자녀가 없었고, 결국 후계 없이 생을 마감했다. 가족 대신 국가와 백성에 헌신하는 삶을 택했다.
특히 고문을 금지했는데 이는 고문이 두려움에 의한 굴복을 만들며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도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의 존엄과 이성을 중시한 계몽 군주였기에 지금까지 그는 큰 존경을 받고 있다. 독일을 점령한 나폴레옹조차 그의 무덤을 지나며 “이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는 여기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경의를 표했으니, 그의 지도력과 명성은 적조차 고개 숙이게 한 셈이다.
“저 왕은 진짜 백성을 위해 나라를 다스렸나 봐.”
“그래서 사람들이 ‘대왕’이라는 호칭을 붙이겠지. ‘세종대왕’처럼 말이야.”
어느새 베벨 광장이었다. 분홍빛 오페라 하우스, 청록빛 돔을 얹은 성 헤드비히 대성당, 양옆의 훔볼트 대학교 본관과 왕립 도서관 건물이 마주 보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20세기의 어두운 장면이 겹쳤다. 1933년, 바로 이곳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나치의 사상에 맞지 않는 책들을 불 속에 던져 넣었다. 2만 권에 이르는 책이 불길에 휩싸였다.
자신의 책이 불태워지는 광경을 직접 본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는 훗날 이렇게 적었다.
“책을 불태우는 것은 단지 서곡에 불과했다. 책을 불태우면 결국 사람도 불태우게 된다.”
베벨 광장의 바닥 유리 아래로 ‘가라앉은 도서관’이 보였다. 비어 있는 책장은 ‘지식의 무덤’인 듯, 그날의 비극을 그려내고 있었다.
베를린은 연약했지만, 강인했다. 상처를 감추지 않고 거리 곳곳에 드러내는 그 솔직함은, 오히려 품격처럼 보였다.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 견뎌낸 노부부처럼, 서로의 흉터를 알고도 사랑하는 이들의 눈빛을 닮았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이렇게 다독이는 듯했다.
“그래, 나 많이 아팠어. 그래도 이렇게 잘 살아왔어. 그러니 너도, 네 아픔을 꼭꼭 숨기지만 말고 나처럼 꿋꿋하게 살아줘.”
우아한 베를린, 이 도시를 걷는 여정이 더욱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