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아이가 길러야 할 진짜 힘
뮌헨 공대 옆, 고풍스러운 성채가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알테 피나코테크, 중세 고전 회화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라파엘로, 루벤스, 렘브란트같은 대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반면, 근대 미술 작품은 맞은편 노이에 피나코테크에서 전시되어야 하지만, 현재 이곳은 2030년까지, 총 11년에 걸쳐 대규모 리노베이션 공사 중이다. 그래서 모네와 마네, 고흐,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주요 작품들이 알테 피나코테크에 임시로 전시돼 있다. 한국이라면 몇 달 밤샘 공사 끝에 '뚝딱' 새 건물이 들어섰을 텐데 이렇게 오래 걸릴 이유가 뭘까?
이 공사는 단순한 인테리어나 외벽 수리가 아니었다. 내부의 냉·난방 설비와 조명, 안전 시설이 모두 낡아 그야말로 기술적으로 완전히 ‘업데이트’를 해야 했다. 1975년에 지어진 건물을 최대한 보존하면서말이다. 아이들은 그래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11년은 좀 너무한 거 아냐…?” 솔직히 나도 살짝 동의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오래 걸려서라도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 유럽의 예술적 자부심이 부럽기도 했다.
시간 관계상 우린 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기로 했다. 미술책에서 납작하게 눌려 있던 그림들이 눈앞에서 숨 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우릴 맞이한 작품은 클림트의 <마가렛 스토노보의 초상>이었다. <키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놀랐다. 섬세하고 우아한 인물 표현, 주인공의 눈빛과 자세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자존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우리 집 부엌에는 르누아르의 〈물랑 드 라 갈렛트〉가 큼지막한 액자 속에 걸려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환하게 웃는 얼굴과 드레스를 휘날리며 춤을 추는 젊은이들. 르누아르는 내게 '행복이 그림이 된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싶은 풍경을 그리는 화가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그의 다른 작품 〈검은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은 조금 달랐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 검은 옷, 검은 모자. 주변 풍경조차 절제돼 있었다. 웃지는 않았지만, 고요한 평화가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눈빛은 르누아르 특유의 ‘빛나는 인간’의 형상이었다. 언제나 웃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조용한 시선이 행복을 준다는 것을 그는 부드러운 붓질로 알려주었다.
모네의 <수련> 앞에서 아이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캔버스 위에 연못이 흐르고 있었다. 형체는 흐릿해도 색은 강렬했다. 초록과 보라, 분홍과 파랑이 부드럽게 뒤섞여, 물인지 수련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감성적으로 번져 있었다. 이 그림은 백내장을 앓던 모네가 말년에 그린 대표작 중 하나다. 뚜렷한 윤곽을 그릴 수 없게 되면서 그는 대신 감정과 인상, 색의 떨림에 집중했다. 형체는 흐릿해도 감정은 선명했다.
“엄마, 진짜 물 같아. 물이 출렁거리는 것 같아요.”
“모네는 눈이 잘 안 보이던 시절에도 이 연못을 계속 그렸대. 마음으로 풍경을 봤던 거겠지.”
내 말에 아이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작품은 고흐의 〈해바라기〉였다. 수없이 사진으로 보았지만, 실제로 본 해바라기는 전혀 달랐다. 거친 붓 터치와 두툼한 물감의 질감이 마치 꽃잎이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이 그림 속 해바라기 꽃잎이 진짜처럼 두꺼워.”
“응, 고흐는 감정을 물감에 그대로 쏟아낸 화가야.”
그 옆엔 그의 〈몽마르트르 언덕의 들판〉도 전시되어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초록 들판, 작고 고요한 오두막이 있는 풍경.
“저기서 살면 학교도 안 가고 참 평화롭겠다.”
다솔이의 솔직한 감상에 우리는 모두 웃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은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건 아마도 그들이 ‘본 대로’가 아니라 ‘느낀 대로’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그려낸 풍경과 얼굴들은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19세기 후반, 사진기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 많은 화가들이 위기감을 느꼈다. 더는 똑같이 정밀하게 그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일부 화가들은 오히려 자신만의 ‘인상’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빛의 흔들림과 색의 감각, 찰나의 공기감 같은 기계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인간만의 시선을 담은 것이다. 모네의 수련, 르누아르의 햇살 가득한 여인들, 고흐의 두터운 해바라기 붓질은 그렇게 탄생했다.
나는 문득 ‘모라벡의 역설(Moravec’s Paradox)’이 떠올랐다. 이 이론은 “기계에게는 인간이 어렵게 여기는 논리나 계산이 쉬운 반면, 인간에게는 당연한 감정, 직관, 감각 같은 것이 기계에게는 매우 어렵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컨대 체스를 두는 인공지능은 세계 챔피언을 이길 수 있지만, 아이의 눈빛을 읽고 공감하며 위로하는 건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앞으로는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적인 능력인 창의력, 공감력, 감정 표현, 스토리텔링이 더 빛날 수밖에 없다.
미래학자들은 말한다. 앞으로 진짜 ‘가치 있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쁨과 감동을 선물하는 일이라고. 기술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사람들은 점점 물질적인 풍요보다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경험’, ‘나를 웃게 하는 일상’, ‘내 존재가 소중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 감정을 나누는 대화, 예술과 이야기처럼 감동을 주는 일들이 오히려 가장 인간적으로 빛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문 앞에 서 있다. 그림 앞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가 길러야 할 건 ‘성적’만이 아니야. 너만의 느낌, 이야기, 감정, 그리고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용기. 그게 진짜 능력이 되는 시대가 오고 있어.”
진로란 역시 정해진 레일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깊이 알아가는 여정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자기 안의 반짝임을 따르며,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자라나야 한다. 알테 피나코테크를 나오면 아이들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안의 감정과 생각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빛이야. 그 빛을 잘 지켜내렴. 그것이 바로, 너만의 작품이자 삶의 길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