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과학자의 꿈에서 건축가의 눈으로

과학의 도시에서 펼쳐진 진로 탐색의 반전

by 은하수반짝

남매는 오랫동안 과학자가 되기를 꿈꿨다. 텃밭에서 상추와 방울토마토를 따며 생명을 느끼고, 밤하늘 별을 세며 우주를 상상했다. 특히 온유는 레고와 과학상자를 몇 시간씩 조립하고, 큐브 맞추기와 종이접기를 하며 손끝으로 세상을 탐험했다. 그래서 우린 아이의 이과적 성향을 확신하며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이번 여행을 계기로 조금 다른 길목에 들어섰다.


독일인 과학 강국이다. 뮌헨 공대와 과학박물관은 아이들을 위한 진로 탐험 필수 코스였다. 독일 과학박물관(Deutsches Museum)은 그야말로 ‘과학의 성’이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항공, 우주, 물리, 화학, 기계, 광학, 음악, 인쇄술까지 전시관마다 세기를 뛰어넘는 발명과 실험의 역사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종일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고, 휴관 중인 체험관이 많아서 꼭 보고 싶었던 에디슨 전구와 구텐베르크 인쇄기, 42미터 길이의 독일 초기 잠수함인 U1 실물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우리가 아이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항공관이었다. 라이트 형제의 동력 비행기 복원 모형 앞에서 온유가 물었다.
“아빠, 이게 진짜 날았어요? 나무로 만든 건데요?”
“응, 새의 날개를 본떠서 만들었대. 목숨 걸고 비행에 성공한 거야.”
비행기 날개에 쓰인 천과 나무, 엔진의 단순한 구조가 더욱 놀라웠다. 하늘을 날겠다는 순수한 열망, 그리고 그 열망이 실제로 하늘을 가른 순간. 그들의 꿈과 도전 정신이 대단했다.

라이트 형제의 동력 비행기

잠시 후, 우린 머큐리 캡슐 앞에 멈췄다. 철제 통처럼 생긴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우주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진짜 이 안에요? 이렇게 좁은데? 동력장치도 없는데 어떻게 지구로 돌아왔지?”
“우주선이 돌아올 때는 중력과 마찰력으로 떨어지고, 낙하산으로 착륙했대.”
상상할 수 없는 공포와 외로움 그리고 그걸 견딘 용기. 가만히 그 캡슐 안을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이곳의 전시물이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실제 삶을 변화시킨 도전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더욱 마음에 남았다. 마치 과학이란, 세상을 향한 던진 질문에 인간이 내린 답변 같았다.


다음은 뮌헨공대. 지도도 없이 찾아간 캠퍼스는 마치 거대한 퍼즐 같았다. 정문이 아닌 옆문으로 들어선 우리는 조용한 건물 사이를 걸었다. 하늘엔 낮게 구름이 깔리고, 발밑에선 사색하듯 걷는 학생들의 발소리가 고요하게 이어졌다. “여기 공기만 마셔도 똑똑해질 것 같아.” 아이들이 장난스레 말하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이 대학은 QS 세계 대학 순위에서 독일 1위를 차지하고, 디젤 엔진을 개발한 루돌프 디젤, 전기 저항 양자화의 클라우스 폰 클리칭 등 1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과학 명문이다. 독일 항공우주센터, 막스플랑크 연구소 등이 캠퍼스 내에 있었다. 학문과 산업, 연구와 실천이 연결되어 있어 더욱 인상 깊었다.

견학 후, 바로 활동지를 작성했다. “10년 후, 내가 뮌헨공대 연구원이라면 어떤 연구를 하고 있을까요?” 다솔이는 유전자와 식물의 융합을 상상하며 ‘해독주스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그렸다. 토마토, 당근, 케일, 미나리가 한 그루에 열리는 나무. 실현 가능성은 둘째치고, 아이디어의 자유로움이 대견했다. 그런데 온유는 뜨뜻미지근했다. “우주항공학자”라는 단어와 함께 길쭉한 우주선 하나를 그리곤, 금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날은 그냥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다음 날 새벽 아이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엄마, 나 과학자 안 할래. 건축가 하고 싶어요.”

조용한 숲길 산책 도중, 아이는 나지막이 말했다. “유럽 건물이 너무 예쁘고, 성도 좋고, 그림도 더 잘 그리고 싶어요. 한국 가면 미술학원에 보내주면 안 돼요?” 아이의 눈빛은 단단하게 빛났다. 사실 이번 여행 내내 온유는 유럽 건축물에 반했고, 감탄하고 사진 찍느라 제일 늦게 따라왔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더 오래 보기 위해 BMW 박물관도 포기했고, 스케치북에는 프라하성과 개선문, 뮌헨의 교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사실 건축은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이다. 아이는 몰입하고 싶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여행은 가끔 교과서보다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무엇을 할 때 가장 살아 있다는

아이와 새벽 산책_꼬마 건축가

느낌이 드는가?” 그 물음은 어느새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삶의 질문을 향한다. 이번 여행에서 온유는 그 질문에 조심스레 ‘건축’이라는 대답을 꺼내놓았다.


물론, 아이의 진로는 사계절처럼 바뀔 수 있다. 내일은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고, 그 다음 주에는 파스타 요리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어린 시절의 특권 아닌가. 아직은 뭐든 될 수 있기에 그만큼 많이 경험할수록 좋다. 초등 시절의 체험은 마치 색연필처럼 아이의 내면에 쌓이고, 훗날 삶을 그려낼 진짜 색이 된다. 정답을 빨리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질문을 던지는 힘’이다. 그 질문이 삶의 나침반이 되고, 자신을 더 잘 이해하며, 그걸 따라 자신의 행로을 개척해 간다. 그런 아이는 언젠가 힘든 공부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키우리라.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이유로 말이다.


공부는 결국 삶을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한 도구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창이 아니라,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드는 불빛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진짜 교육은 아이 마음속 작고 반짝이는 불빛을 눈치채고, 함께 믿어주고 응원하는 일이다. 진로는 성적보다 먼저 오고, 소명은 성과보다 오래간다. 부모는 아이가 자기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도록 다정히 옆에 서 있는 사람이다.

“네 안의 불꽃을 잘 따라가렴. 그 길이 바로,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드는 시작이란다.”
그리고 힘주어 살짝 덧붙였다.
“물론... 설계할 땐 수학도 물리도 꽤 잘해야 한단다, 아들아.”

소년의 가슴에 새겨진 유럽


keyword
월, 목, 일 연재
이전 10화당신은 꿈꾸던 삶을 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