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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꿈꾸던 삶을 살고 있나요?

루트비히 2세, 예술가 왕이 건넨 뜻밖의 위로

by 은하수반짝
루트비히2세와 바그너_바이에른 국립 박물관

노이슈반슈타인성에 가기 전, 나는 루트비히 2세를 알지 못했다. 그저 디즈니 성의 실제 모델이 독일에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런데 이 성에 대해 알아갈수록 성보다 더 마음에 남는 건 이 성을 건축한 예술가 왕의 이야기였다. 루트비히 2세. 정치를 외면한 군주, 예술을 꿈꾼 사람, 그리고 환상 속 성을 짓기 위해 미치광이가 된 왕.


루트비히 2세는 키가 193cm에 이르는 장신에, 오묘한 푸른 눈과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닌 매우 잘생긴 왕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화 속 왕자 같다고 표현하곤 했다. 실제로도 그는 외모만큼이나 내면 또한 꿈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내성적이고 고독했던 그는 사람보다 자연과 예술을 더 사랑했고,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했다.

바그너를 위한 전폭적인 지원은 신하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 바그너를 떠나보낸 루트비히 2세는 오직 성 건축에 몰두했다. 그가 지은 세 개의 성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고독한 영혼이 현실에 새긴 꿈속 풍경이다. 환상적인 노이슈반슈타인성, 섬세한 린더호프성, 웅장한 헤렌킴제성은 각각 독특한 모습으로 한 사람의 열정과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눴던 엘리자베트(나중에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됨)는 루트비히 2세가 죽자, 훗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미치광이가 아니에요. 다만, 꿈을 꾸고 있을 뿐이에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이해받지 못했던 예술가 왕의 내면에는 창조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어린 루트비히2세가 살았던 호엔방가우성

진정한 예술은 마음속 깊은 외로움에서 비롯된다고 릴케는 말했다. 그렇다면 루트비히의 몽상은 어린 시절의 깊은 외로움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그는 1845년 바이에른의 국왕 막시밀리안 2세와 프로이센 출신 마리아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의 사랑 대신 교사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의무와 규율 속에 갇혀 소년은 더욱 고독해졌다.


루트비히는 어릴 때부터 화려한 궁전보다 숲과 호수를 더 좋아했고, 연회장보다는 시와 음악 속에 숨어들었다. 아버지는 그를 강인한 왕으로 키우려 했지만, 루트비히의 내면에는 이미 예술가의 영혼을 가진 내성적인 아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자연은 도피처였으며 꿈은 현실을 견디는 유일한 방패가 되었다.

루트비히 2세의 초상


그가 혼신을 다해 지었던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바위 위에 세운 백조의 성’이라는 뜻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백조 기사 전설에 심취해 있던 그는 실제로 백조를 숭배했고 백조처럼 고결하고 고독한 존재로 살기를 꿈꿨다.


하지만 그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잘못된 선택을 해 왕국을 패전국으로 만들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프로이센에 주도권을 내주며 외교적 무능을 드러냈다. 반복된 실패로 그를 점점 현실로부터 멀어졌고 성 건축에만 몰두한 나머지 나라의 재정이 파탄났다. 신하들은 그를 정신병자로 몰아 베르크 성에 유폐시켰고, 사흘 만에 주치의와 함께 근처 호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죽음은 자살로 처리됐지만, 지금도 많은 이들이 타살이라 믿고 있다. 예술가 왕은 가장 동경했던 자연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다양한 역할과 책임 속에서 하루를 숨차게 살아간다. 하루하루는 길고도 버겁지만, 일주일은 어느새 훌쩍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 예술가 아이는 늘 조용히 말없이 숨어 지낸다. 하지만 문득문득 창밖에 쏟아지는 햇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잎, 꼬마들의 천진난만 목소리 속에서 다시금 숨을 고른다.

고요한 공간과 시간, 숲과 석양, 책과 사색은 비로소 나를 숨쉬게 한다. 현실에서 물러나 늘 숨을 쉬고 싶은 나 역시 어쩌면 루트비히 2세처럼 세상과 다르게 살고 싶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이들과 함께 성을 다녀온 뒤, 활동지에 ‘현실과 예술 중 무엇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다솔이는 주저 없이 말했다. “먹고사는 데 예술은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저는 우선 현실을 택할래요.” 세상을 아는 어른의 눈빛이었다. 반면 감수성이 풍부한 온유는 달랐다. “이 성 덕분에 행복했어요. 예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두 아이의 전혀 다른 대답은 또다시 내 안에 숨어 있던 질문을 꺼내게 만들었다.

현실과 이상, 무엇을 택할 것인가? 사실 예술가의 삶은 외롭고, 종종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사람의 가치를 물질과 성공 여부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일까, 마음속에 꿈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을 철없거나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다.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생각이 많고 감성적인 나는 문득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내가 잘못된 건 아닐까?’하는 죄책감이 마음 한구석에 스며들곤 한다.

하지만 루트비히 2세 덕분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는 생전 ‘미치광이 왕’이라 불렸고, 예술에 몰두한 끝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독일에서 가장 많은 관광 수입을 올리는 명소가 됐다. 바이에른 주민들은 집집마다 그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경외심과 감사를 표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의 꿈은 시간을 초월해 많은 이들의 동심을 일깨운다.


그의 꿈은 과거에는 무모했지만, 현실에서는 경제와 문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어쩌면 우리의 꿈도 그렇지 않을까? 당장은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라도,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비추는 등불이 될지 모를 일이다.

꿈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이 주입한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간다. 설령 그 길이 느리고 외로워 보여도, 그 안에는 가장 깊고 진한 만족이 깃든다.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설렘, 내면에서 피어나는 의미, 그리고 타인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함. 그러니 우리도 마음속에 성 하나쯤은 짓는 게 좋겠다.


<레미제라블>의 빅토르 위고가 말했듯, 꿈은 우리가 인생이라는 긴 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별빛이다. 이 팍팍한 현실 속에서 나를 숨 쉬게 해주는 꿈, 또 어쩌면 언젠가는 대중이 인정하는 ‘아름다운 소신’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미친 척하고 지었는데, 알고 보니 모두의 가슴을 울리는 명소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루트비히 2세가 어린시절을 보낸 알프제 호수와 호엔방가우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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