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음식과 사람 그리고 여유에 관하여
독일 물맛은 독특하다. “악, 물맛이 이상해. 물고기 백 마리는 빠졌다 나온 것 같아.” 온유는 ‘Still’이라고 적힌 무탄산 생수조차도 물고기가 빠졌는지 안 빠졌는지를 기막히게 구별해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는 바다 생물의 껍데기와 산호가 쌓여 굳어진 석회암 지형인데, 그 땅을 통과한 물엔 탄산칼슘이 스며들어 약간 미끌거리는 쇠 맛이 난다. 한국의 청량하고 맑은 물과는 확연히 다르다.
유럽인들은 이 거친 물맛을 희석하고 산뜻함을 맛보기 위해 탄산수를 즐긴다. 대부분 수돗물을 식수로 마시는 문화여서 식당이나 마트에서 파는, 특정 지역에서 채수한 미네랄 워터나 천연 광천수는 ‘프리미엄 제품’ 여겨지고 가격도 만만치 않다. 유럽에서 가장 그리운 것은 관공서든 식당이든 어디서나 마실 수 있던 공짜 물 한 잔이었다.
대신 맥주는 정말 맛있다. 1516년에 제정된 ‘맥주 순수령’은 맥주의 재료를 보리, 물, 홉, 효모로 제한하여 품질과 순도를 지켜왔다. 중세 시대 맑고 안전한 물이 귀했던 시절, 독일인들은 발효를 통해 정제된 맥주를 물보다 더 안전한 음료로 여겼다. 보리로 만든 맥주는 곡물의 영양을 담고 있었고, 알코올은 세균을 막아주었기에 맥주는 물과 빵을 겸한 ‘마실 수 있는 주식’이 되었다.
노동자에게는 한 잔의 맥주가 에너지이자 위안이었고, 아이들조차 알코올 농도가 낮은 맥주를 음료처럼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나조차 독일 맥주는 맛있었다. 쓴맛은 적고, 깔끔하고 담백했으며 목넘김까지 부드러웠다. 진짜 맥주는 독일 음식과 제일 잘 어울리는 음료였다.
독일 음식의 대명사는 학센이다. 뮌헨에 도착한 첫날, 전통 식당 앞을 어슬렁거리며 망설이던 우리 앞에 낯익은 한국말이 들렸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군요. 이 식당 맛있어요.” 고개를 돌리니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머금은 독일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자신은 뮌헨 대학 교수라며 부산에서 온 한국인 제자에게 한국말을 배웠단다. 그 호의에 이끌려 식당 문을 열었다.
오후 2시가 넘었지만 식당 안에는 맥주를 마시며 유쾌하게 웃고 있는 현지인들로 가득했다. 붉은 치마를 입은 종업원들이 활기차게 소세지와 맥주를 나르고 있었고, 우린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아 학센과 부어스트를 주문했다.
학센과 부어스트, 드디어 만났구나. 슈바인학센의 겉은 포크가 튕길 정도로 바삭했다. 하지만 그 속살은 육즙이 가득한 천사의 살결처럼 부드러웠다. 바삭한 껍질은 고소하고 감칠맛이 있어서 과자처럼 입맛을 당겼다. 양념이 없어 약간 퍽퍽할 수는 있지만, 함께 나오는 사우어크라우트(절인 양배추)와 겨자, 맥주와 함께 먹으면 깊은 고기의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은근히 중독적이다.
부어스트는 우리가 아는 소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인공적인 맛은 전혀 없고 짜지도 않았다. 돼지비계와 송아지 고기 그리고 은은한 허브가 섞인 하얀 소시지는 담백하고 고소하면서도 무척 부드러웠다. 바이에른 사람들은 하루를 맥주 한 잔과 부어스트 한 조각으로 시작한다. 방부제 없이 그날 만든 것은 그날 안에 먹는다는 부어스트의 원칙은, 순수하고 정직한 바이에른 사람들의 기질을 꼭 닮아 있었다.
바삭한 학센 한 입, 부드러운 소시지 한 입, 맥주 한 모금이면 여행의 피로가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날 식당에서 맛본 건 음식만이 아니었다. 정다운 인사와 눈웃음 속에 담긴, 뮌헨 사람들의 삶의 결이었다. 어딘가 바삭하고, 또 어딘가는 부드러운, 마치 그들의 학센처럼 말이다.
뮌헨은 대도시지만 곳곳에서 푸른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영국 정원’이라는 78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심 공원 덕분이다. 풀밭에는 자전거를 타다가 멈춘 사람들이 누워 있고, 강물 위에서는 청년들이 서핑을 타고 있었다. 반 나체로 선탠을 즐겨도 시선 하나 주지 않는 자유로움, 그 거침없는 자유분방함이 낯설고도 부러웠다.
영국 정원 안쪽에는 7,000석의 규모의 의자와 테이블이 있다. 뮌헨 도심 속 공원이면 어김없이 있는 ‘비어가르텐’이다. 저녁이 되면 맥주 한 잔을 들고 수다를 떨고, 공연에 박수를 보내며 환호하는 뮌헨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다. 맥주잔을 들고 있는 모든 이들은 서로 친구가 된다. 이들은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자신들의 오늘을 위로하고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서로를 향한 다정한 눈빛과 웃음소리, 여유롭게 들이키는 맥주,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키워도 여유를 잊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신기했고 또 배우고 싶었다.
유럽인들은 삶을 참 자유롭고 유쾌하게 살아간다. 늘 시간에 쫓겨 중요한 순간마저 스치듯 흘려보내는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는 성취와 경쟁 속에 매몰되어 타인도 자기 자신조차도 존재 자체로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다. 약점은 드러내기 전에 감추고, 남의 실수엔 날카롭게 반응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행복은 빠름과 성과에 있지 않다는 것을. 행복은 맥주 한 잔에 감탄하고 햇살 아래서 가족이나 친구와 웃는 그 느림의 순간 속에 스며 있다는 것을.
그 자유와 여유, 현재를 음미하는 태도는 내가 가장 배우고 싶은, 가장 아름답고 세련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뮌헨은 살아보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다. 사람도, 소시지도, 시간도 모두 잘 익어 있었다. 단, 물맛만 익숙해진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