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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슈반스타인성에 배인 상상과 고독

비가 그려준 백조의 성 수채화

by 은하수반짝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우리 가족이 가장 손꼽아 기다려온 여행지였다. 신데렐라가 살았던 디즈니 동화 속 성, 숲속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장소. 그런데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는 계속 비를 예고했다. 성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마리엔 다리가 폐쇄될 수도 있다는 말에 걱정이 밀려왔다. 게다가 성 내부 관람을 위한 온라인 티켓도 간발의 차이로 이미 마감된 상태. 비행기를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왔건만 성 안도 못 보고 돌아가야 하나 싶었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이끼 낀 성벽이라도 손끝으로 만져보자는 마음으로 우산을 들고 퓌센행 기차에 올랐다.


비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내리고 있었다. 기차 밖 풍경은 마치 알프스가 선물하는 수채화 같았다. 지붕이 예쁜 작은 집들, 초록 언덕 위를 노니는 소들, 옥빛으로 빛나는 석회수 호수. 동화 같은 풍경에 복잡하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비가 와서 그런가, 퓌센은 더 푸르고 더 맑았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동화 왕’ 루트비히 2세의 작품이다. 그는 현실보다 예술과 환상의 세계를 더 사랑했고, 중세 전설과 기사 이야기, 바그너의 오페라에 매혹되어 1869년부터 이 성을 짓기 시작했다. 직접 내부 설계까지 손을 댈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1886년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7년의 공사는 막을 내렸고, 실내 일부는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 현실에서 다 이루지 못한 왕의 이상은 오히려 이 미완성 덕분에 더욱 신비롭고 고독하게 다가온다.


당일 아침, 큰 기대 없이 매표소에 들렀다. 혹시라도 비 때문에 누군가 예매를 취소하진 않았을까, 마음 한켠에 작은 희망을 품고. 그런데 웬걸,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11시 티켓, 있습니다.” 그 말이 귓가에 맴도는 순간, 며칠간 우리를 조마조마하게 만들던 그 비가 갑자기 천사처럼 느껴졌다. 아, 전화위복은 진정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예상 밖의 선물 앞에 모두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마리엔 다리로 가는 길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비를 입은 여행자들이 긴 줄을 따라 서 있었고, 우리는 비에 촉촉이 젖은 숲길을 따라 버스에 몸을 실었다.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따라 버스가 천천히 올라갈수록, 창밖으로 짙은 안개가 서서히 밀려들었다.


다리에 발을 딛는 순간,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구름 사이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노이슈반슈타인 성. 하늘을 배경 삼아 절벽 위에 떠 있는 듯한 그 모습에 숨이 멎었다. 부옇게 깔린 안개가 성의 윤곽을 더 신비롭게 감쌌고, 아이들은 “진짜야? 이거 CG 아니야?” 하며 눈을 반짝였다. 인파 사이로 짧은 순간을 포착하듯 사진을 몇 장 남기고, 우리는 서둘러 성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절벽 위의 백조, 노이슈반스타인성


산책로에는 젖은 이끼와 흙, 짙은 소나무 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빗물이 만든 고요 속에서, 루트비히 2세가 어린 시절 지냈다는 노란빛 호엔슈반가우성과 잔잔한 알프제 호수가 아래로 펼쳐졌다. 안개 속 그림 같은 풍경이 눈앞에 스르르 스며들고, 그 안에 서 있는 우리도 마치 오래된 동화 속의 한 장면이 된 듯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용히 뭉클해졌다.

호엔슈방가우성과 알프제 호수 전경


성 내부는 오디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가이드 투어로만 관람할 수 있었다. 왕좌의 방에 들어서는 순간, 웅장한 동방교회 양식의 공간이 우리를 압도했다. 그러나 그 중심, 왕좌는 끝내 만들어지지 않은 채 비어 있었다. 오히려 그 빈자리가 왕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했다. 별이 떠 있는 천장, 성인과 예언자의 황금빛 성화들, 모자이크 바닥과 돔형 지붕 그 안은 왕권이 아닌, 왕의 고독이 머무는 성소 같았다.

왕좌가 없는 왕좌의 방


침실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짙은 호두나무로 조각된 침대는 마치 고딕 성채처럼 정교했다. 왕의 침실 옆으로 이어지는 인공 동굴과 겨울 정원, 탁 트인 창밖 풍경까지 이 성은 잠시도 현실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한 사람의 은신처였다. 아이는 “여기서 자면 꿈에서 깨고 싶지 않겠다.”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이 방은 단순한 침실 이상의 공간이었다. 짙은 커튼 너머로 스며드는 옥빛 알프스의 풍경, 벽마다 새겨진 천사와 덩굴 장식들, 침대 기둥 끝에까지 깃든 치밀한 아름다움이 그 증거였다. 그는 이 작은 방 안에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과 현실에서 도망치고픈 간절함을 모두 담아 두었다.

정교한 장식물의 왕의 침실
고독이 배인 겨울 정원과 동굴


마지막으로 들어선 음악가의 방엔 바그너의 오페라 장면이 벽화를 따라 펼쳐져 있었고, 루비빛 커튼과 촛대, 작고 우아한 무대는 왕이 원했던 환상의 무대였다. 그는 이곳에서 현실의 외로움을 예술로 견디고자 했던 게 아닐까. 그에게 이 백조의 성은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상상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흐르는 듯한 음악가의 방

지금껏 어떤 궁전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울림이었다. 이 성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깊은 내면이 조각처럼 새겨진 장소였다. 방마다 배어 있는 섬세한 취향,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고집, 외로운 상상과 풀리지 않는 슬픔이 가구와 벽화, 천장의 별빛까지 고요히 스며 있었다. 비가 내려서일까. 그 감정들이 더 또렷하게 피어올랐다. 절벽 위에 우뚝 선 장대한 성의 모습보다도, 침실의 조각 하나, 겨울정원의 작은 의자 하나에서 전해지던 왕의 고독과 꿈이 내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았다. 마치 한 예술가의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본 듯, 조용히 울컥해지는 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 빗방울 사이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비는 종종 우리의 계획을 흐트러뜨리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진짜를 보게 된다. 오늘 비가 아니었다면 나는 동화왕의 고독이 아닌, 그저 성의 아름다운 겉모습만 보고 돌아섰을지도 모른다. 인생도 그렇다. 모든 게 맑고 환한 날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잿빛 구름 아래에서야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 가끔은 우산 하나 들고, 젖는 걸 감수하며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날도 괜찮다. 그날의 기억은, 마치 이 비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오래도록 마음을 적셔주니까.


노이슈반스타인성의 입구 and 풍경을 찍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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