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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맞닿은 자리, 알프스 노르트케테에서

경이로운 풍경 속에서 다시 새긴 감사

by 은하수반짝


유럽에 오면 알프스는 꼭 올라가 보고 싶다던 아이들의 바람을 따라, 하늘이 유난히 맑던 날 우리는 기차를 타고 인스부르크로 향했다. 오스트리아 티롤주의 주도, 인(Inn) 강이 흐르는 계곡 한가운데 자리한 이곳은 북쪽 노르트케테와 남쪽 젤랄프 산군이 병풍처럼 둘러싼 도시다. 두 차례 동계 올림픽을 치른 이곳은 사계절 내내 산과 강, 사람과 자연이 한 호흡으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었다. 기차가 알프스에 가까워질수록 넓은 초원과 부드럽고 웅장한 산자락이 마음을 정화시켰다. 햇살을 머금은 탁한 에메랄드빛 호수는 이국적인 설렘을 부추겼다.

“엄마, 저 호수 색 진짜 이상해요. 약간 물든 우유 같아.”
창밖을 가리키는 온유의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빙하 녹은 물이라 그래. 순한 흙이 들어 있어서 탁하게 빛나는 거야. 우유처럼 부드럽지?”
“근데 진짜 예쁘다. 신기하게 예뻐요.”
다솔이도 거들었다.

중앙역에 내린 순간, 도시의 느낌은 ‘청량’ 그 자체였다. 눈에 맑고 투명한 필터를 끼운 듯, 파스텔톤의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우아하게 늘어서 있었다. 동화 같은 풍경에 홀려 자꾸 걸음을 멈추다 보니 푸니쿨라를 놓칠 뻔했다. 정신을 다잡고 노르트케테행 푸니쿨라에 올랐다.


시내를 떠나 산을 오르자 문명은 작아지고 자연이 점점 더 커졌다. 초원 사이로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유유히 오르고, 경사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등산객들이 한 점 한 점 그림처럼 내려다보였다. ‘저 가파른 길을 걸어서 오른다고?’ 놀라움과 함께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들에게 이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숨 가쁘게 오르내리며 함께 시간을 나누는 벗이었다.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그들의 여유와 단단한 의지가 부러웠다.


푸니쿨라를 한 번 갈아타고 도착한 전망 레스토랑, 인스부르크 시내를 내려다보며 먹는 소시지와 시원한 맥주라니, 천상에서 맛보는 한 끼임이 틀림없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노르트케테 정상에 닿자, 차가워진 공기에 니트와 바람막이를 껴입었다.

“엄마, 저 까마귀 부리가 노란색이에요. 독수리일까요?”

온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알프스 갈고리부리 까마귀야. 이 산을 오래 지켜온 진짜 주인이지.”

그러자 온유는 까마귀를 오래 바라보다가 외쳤다.

“산도, 새도, 하늘도 다 멋있어요”

냉랭한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자 바쁜 도시의 리듬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쫓기듯 살아오던 마음이, 눈앞에 펼쳐진 이 광활한 풍경 앞에서 고요해졌다. 태고의 숨결을 품은 거대한 산맥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고 겸허한 존재였다. 알프스의 바람은 내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야.”
그 순간,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던 염려와 조급함, 비교로 인해 생긴 불필요한 긴장들이 바람결에 흩날리듯 풀려나갔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랐다. 하얗게 눈이 남은 경사면과 울긋불긋 피어난 들꽃과 절벽에서 쉬고 있는 산양떼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제 자리를 지키는 생명들은 경이로웠다.


인스부르크의 정상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서 있었다. 유럽의 산 정상마다 서 있는 십자가는, 마치 하늘과 맞닿은 자리에서 올리는 인간의 고백같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닿은 그 끝에서, 사람들은 이 세상보다 더 크고 깊은 품이 자신들을 감싸고 있음을 느끼고, 그 경외를 십자가에 새겨두었을 것이다. 노르트케테 정상의 십자가 역시 눈부신 능선과 하늘빛 속에 어우러져, 이곳의 자연을 한층 더 숭고하게 빚어냈다.

인스부르크의 지붕에서


“엄마, 산 뒤에 또 산이 있어요. 계속 이어져요. 이게 진짜 알프스구나!”

너무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는 말이 멈춘다. 사방으로 끝없이 이어진 능선, 바람에 따라 천천히 회전하는 듯한 세상. 우리는 한참이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풍경이 우리를 붙든 건지, 우리가 풍경 속에 스며든 건지 알 수 없었다. 각자 혹은 함께 앉아 그 고요하고 완전한 순간을 음미했다.

20여 년 전,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홀로 올랐던 알프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아름다웠지만, 지금처럼 네 식구가 함께 맞는 이 바람과 하늘은 더 깊고 소중했다. 만년설로 눈덩이를 뭉쳐 던지는 온유, 멀리 펼쳐진 산맥에 감탄하는 다솔, 묵묵히 내 곁을 지키는 남편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다. 가만히 마음을 눌러주는 한 가지 단어는 ‘감사’였다.

‘감사하다. 지금 이 순간, 이 삶이 너무 고맙다.’


정상이 주는 경외와 사랑하는 이들과의 연결, 그리고 마음을 적시는 바람과 햇살까지. 시간도, 바람도, 우리의 대화도 모두 마음속에 고이 접어 넣고 싶었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다음 일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존재 자체의 고요함이 살아 있는 이곳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한 이 순간은 내 삶의 가장 찬란한 페이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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