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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정말 정신병자인가?

by Mynameisanger

정조를 좋아한다. 직접적 아동학대 피해자는 아니지만, 아동학대 피해의 당사자이며 생존하지 못한 사도세자의 아들로, 가정내 폭력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품고 살았던 점을 좋아한다. 심한 불면증,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한 홧병, 폭음을 즐기고 골초였던 점도 트라우마 생존자들과 증상이 비슷해서 친근감을 느끼곤 했다.

최근에는 사도세자에 대한 책을 읽고 있는데 사도세자가 정말로 정신병자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몇 백년 전의 일이므로 믿을 만한 사료가 제한적인 점이 사도세자를 파악할 때의 난점이다. (학자도 아닌 일반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사도세자는 정말로 정신병자였을까?

나는 사도세자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에 대한 첫 정보는 나인들을 괴롭히고 옷이 불편하다면서 소리지르며 옷을 찢는 사극의 한 장면이었다. 물론 영조의 아동학대는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그가 정신병리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한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범위라고 생각한다. 이미 이에 관한 책이나 의견들은 많이 나온 것으로 안다. 나는 여기에 사도세자가 정신병자였다는 기록 자체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한중록은 정말 믿을만한 기록인가?


먼저 사도세자가 정신병자라는 주장의 최대 근거인 한중록은 진위가 의심된다. 이유는 한중록이 작성된 배경이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지만,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잘못을 깨닫도록 끊임없이 설득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을 궁중으로 옮겨 짓고는 그 사당이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곳에 어머니의 거처를 지었고, 심지어 환갑장치에서도 사도세자의 무덤에 들러 가도록 어머니를 설득했다. 이와 같은 정조의 끈질긴 어머니 설득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는 편지 형식의 <한중록>을 통해 사도세자의 정신병력을 강력히 피력해 자신을 피해자로 포지셔닝했다.

물론 처음에는 여성이고, 영조와 사도세자사이에서 마음고생을 했던 사람이 남긴 기록이라고 생각해 한중록에 담긴 내용이야말로 진짜 일어난 일이 아닐까 믿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남긴 궤적을 들여다보면 과연 발언에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친정과 관련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논리없이 편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지나칠 정도의 잔인성을 보였다. 적어도 평소에 객관적인 언행을 보였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은 서책이 아니라 개인 간의 편지를 엮은 것이 아닌가. 우리가 문자나 전화에서는 사실을 왜곡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하듯, 여기에도 그와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그녀의 정치적 입지다. 정조는 외척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이었지만 어머니인 혜경궁 가문은 죽을 때까지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요즘도 그렇듯, 당시 정치세력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일치하는 말을 해주는 스피커는 떠받들여지고 그들이 남긴 말은 살아 상당 기간 영향력을 과시한다. 더군다나 조선은 여성을 억압하고 여성의 존재 이유를 아이를 낳는 것에 국한하며 교육이나 정치에서 배제해왔으니, 여성이 쓴 글이 남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기존 세력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었기에 살아남은 글일 확률이 크다.


기록오타쿠 정조가 아버지의 허물을 숨겼을까?


정조를 다룬 여러 역사서, 교양서들을 보면 승정원 일기를 불태운 범인으로 정조를 은유하는 경우가 꽤 있다. 정조가 아버지의 허물을 삭제하기 위해 기록을 없앴다는 추측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영조의 억지스런 주장들을 보며 컸던 정조는 그와 다른 사람으로 자라겠다는 굳은 결심하에 상당히 객관적인 논리체계를 마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데에도 그와 같은 노력을 펼쳤다.

화성행궁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가 무엇인가? 원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려면 만들어진 당시가 보존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으며 화성이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화성성역의궤때문이다. 성곽 축조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적었다. 외관이나 내부 구조에 대한 입체적인 구조는 물론 건축 부재, 공사에 사용된 기구, 거기에 쓰인 가격까지 모조리 꼼꼼하게 다 적어놨다. 물론 발행은 순조때지만 그걸 적은 건 정조 때다. 그런 사람이 아버지의 허물을 숨기기 위해 역사의 일부를 지우고 왜곡한다? 그렇게 후세에 의도가 뻔히 드러나는, 유치하면서도 객관적이지 못한, 치부가 될 수 있는 행동을 스스로 할 만큼 어리숙한 인간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심환지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정치 9단이던데.


가해자들은 사실왜곡이 특기다

아동학대 가정에서 가해자들이 본인들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자주 발생한다. 피해자가 그럴만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자를 때렸다는 식의 주장이 자주 반복하며, 가해자들은 그것을 끝끝내 주장하고 심지어 그게 사실이라고 믿기까지 한다.

영조가 경종 독살(로 추정)한 죄책감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을 포함해 주변을 고문하고 괴롭히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미천한 출신으로 가지게 됐던 열등감을 자극하는 아들 사도세자의 뛰어난 능력은 여러 번에 걸쳐 ‘왕을 그만하고 너에게 물려주겠다’는 선양 쇼를 함으로써 짓밟아야만 했다. 심지어 처음 양위소동을 했던 건 사도세자가 고작 다섯 살 때였다.

지속된 양위소동에 걸쳐 아들을 잔인하게 죽인 뒤, 변명과 합리화의 대가인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많은 아동학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가해자는 아동을 실컷 때리고 고문하고 괴롭히고 울리고 병들게 한 뒤, ‘얘가 말을 안 들어서 때렸다’고 변명한다. 많은 경우 과장이고, 어떨 때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발명해 낸다. 양위소동은 영조의 자책감과 열등감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으면서 아들을 공식적인 명분으로 신체 및 정신적 학대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세자의 생명을 빼앗은 다음에는, 혹시나 정조 등 후대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막기 위해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을 뒤집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조처까지 해놓는다.


과연, 본인이 한 행동에 당당한 사람이 이렇게 두려워하는 듯한 조치를 해놓을까?


그리고 생각했다. 만약 사도세자의 정신병력이 아동학대 피해자들이 자주 당하듯 가해자에 의해 날조 혹은 과장된 것이라면, 가해자가 남긴 얄팍하고 자기본위적 기록에 따라 300년 지난 후대에도 여전히, 줄기차게, 영조-사도세자-정조에 관한 영화나 드라마만 나오면 항상 ‘정신병자’로 소환되고 있는 사도세자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줄 수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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