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더 나은 전문가가 될 것인가
사망
“아빠 할머니 성이 장씨였어?” 큰아이가 물었다.
“아니. 이씨인데.”
“그럼 왜 상주 이름에 장씨로 돼 있어?”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외할머니는 6.25전쟁이 터지기 전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신혼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돼 있던 남편은 혼자서 월북을 했다. 어머니가 너무 어렸을 적의 일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 채 이제껏 살아왔다.
국민학생 시절 방학이 되면 형과 나는 거의 방학 내내 전주의 외가에서 지냈다. 대학생이었던 두 명의 외삼촌과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이모는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진짜 열심히 놀아줬다. 죄송하게도 나는 내 조카들에게 바쁘다는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집 근처에서 만화책과 비디오를 빌려 오고 풍년제과에서 여름에는 팥과 얼음이 수북한 팥빙수를 겨울에는 계피향이 가득한 달디단 단팥죽을 먹었다. 당시만 해도 일본어 자막만 있고 한글 자막이 없는 것들이 있었는데 일본어를 하시는 외할머니가 졸다가 깨면 가끔 번역을 해주시곤 했다.
어린 내가 당시에 가장 궁금했던 건 이모와 외삼촌이 어머니와 성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외할머니는 형사였던 사람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세 명의 자녀를 나았지만 그리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유년은 끔찍했다. 거의 매일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부부싸움. 폭력과 비명. 하지만 어머니가 가장 분노했던 건 새아버지가 어디에 가도 당신을 딸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KBS에서는 이산가족찾기를 생방송으로 방영했다. 십 만 건이 넘는 접수가 들어왔고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만났다. 그 시기에 어머니의 고모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냐는 것이었다. 고모부가 매형을 만나려고 신청했는데 직계가 아니면 신청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반드시 어머니가 신청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거절했다.
어머니가 중학생이었을 때 처음 보는 친척이 어머니를 만나러 온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고 건너서 들은 얘기라면서 생부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일본으로 같이 가면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거절했다. 현재의 고통은 견딜 수 있었지만 미래의 불확실함은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였고 그곳의 삶이 훨씬 나을 거란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증조 할머니가 두 번 결혼하셔서 그런 거야.”
큰 아이가 증조부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걱정이 됐지만 어느새 아이는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식탁 위에 놓여있던 클리어화일 속의 시체검안서를 들여다보았다.
98세 여자환자는 한달 전부터 침상에서만 지냈고 일주일 전부터 식사량 줄다가 금일 반응 없어 내원함. 사인: 노환
아마도 큰 아이는 증조할머니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결혼을 두 번 했다는 사실마저도 금세 잊힐 것이다. 내가 시체검안서에 기록한 노환으로 사망한 수많은 환자들 중에서 단 한 명의 삶도 떠올리지 못하듯 아이도 그럴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