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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뇨뇨 Nov 17. 2020

바람이 분다

상념의 방


바람이 분다. 동시에 내 마음의 바람도 흔들림과 함께 일렁인다. 기숙학원 운동장 구석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서 맡는 밤공기는 하루 중 유일하게 탁한 공기에서 해방된 순간이었다.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꼼짝없이 앉아서 문제를 풀고 수업을 들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40여 명이 닭장처럼 빽빽히 앉아 내뱉는 날숨 속엔 패배의식이 가득했다.


나 역시도 그 날숨의 주인공 중 하나였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가장 큰 실패를 겪고 있었다. 그간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패배감을 매일 느꼈다. 치열하게 공부를 하다가도 문득 차오르는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나를 지독히도 괴롭혔다. 그래서 매일밤, 아무리 추워도 벤치에 앉아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꼭 원하는 대학에 가게 해주세요’ 라는 소망을 악에 받쳐 흘려보냈다. 그러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져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내 소망이 바람과 함께 신에게 전달됐는지 운 좋게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느라 바람의 여유는 잊은 지 오래였다. 나의 오랜 로망 중 하나였던 학보사에서 일할 때였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방학, 교내 미화 노동자들의 부당 노동 처우에 대한 집회가 있으니 취재를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집에서 학교까지 대략 왕복 2시간.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이어지던 때. 마음 깊숙한 곳에서 거절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밀려왔지만 결국엔 가장 두꺼운 패딩을 입고 집을 나섰다.


집회 장소에 도착하자 시위는 이미 시작해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노년의 미화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모여 조잡한 나무 피켓과 소리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확성기를 들고 부당처우 개선하라며 외치고 있었다. 지나가는 이 하나 없었고, 듣는 이는 취재 나온 학보사 기자들뿐이었다. 한적한 학교의 모습은 이들의 외침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바람은 가혹하게도 그들의 목소리를 다 덮어버릴 만큼 매서웠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소망을 들어주리라 믿었던 것이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차갑게 누군가의 애타는 목소리를 잠식하고 있는 꼴을 보자니, 바람이 원망스러워졌다.


그 순간, 매섭기만 했던 바람에 기시감이 들었다. 재수 시절 나의 어려움을 흘러보내주던 바람이 떠오른 것이다. 이들의 외침도 고통스러워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메아리 없는 외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집회에서부터 시작되는 외침이 바람을 통해 더 널리 퍼져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나에게 그랬던것처럼 이들의 어려움도 바람이 달래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위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뉴스를 편집해 올렸다. 그리고 그들의 어려움이 더 많은 이들에게 닿을 때까지 기사를 썼다. 조회수가 올라 갈 때마다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누군가는 서명에 동의를 하기도 했고, 시위에 함께 참여를 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마주한 미화 노동자들의 표정도 조금은 밝아진 것만 같았다.


집회 소리가 더 이상 울리지 않은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합의가 겨우 시작됐을 뿐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였다. 바람을 타고 전해진 목소리에 힘이 보태졌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다시 창 밖으로 불어오던 바람이 참 반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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