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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종 종Mu Oct 31. 2023

맥주잔을 가리키며

인간관을 말해준 이

8#.

가을에  어느 한 가지에 신속했다고, 오늘 나는 말할 수 있다.


여름이 떠나갈 무렵에 듣게 된 누군가의 가벼운 칭찬,

"목소리가 듣기 좋아요. 시낭송 같은 걸 해보시면   좋을 거예요."


그대, 아는가. 칭찬은 듣고 삼키면 가지 않은 길이 된다는 걸.


어릴 적 공책 뒷장에 끄적거린 낙서를 보며 친척 어른이 '화가가 될 아이야'라고 추켜세워 준 순간을 기억하는 한 미술가의 길이 내겐 가지 않은 길로 남아 있다. 반대로, 학교 백일장 심사가 끝난 오후에 국어선생님이 일부러 날 찾아서 해 준 한 마디 칭찬은 그 이후 '내가 걸어갈 길'에 대한 첫 이정표가 되었다.


목소리 칭찬을 받던 그날은, 큰 결심을 하고서야 모임에 참석할 정도로 기력이 달렸고,  몸상태가 가라앉을 때면 늘 그렇듯 옷차림과 화장에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허술한 그대로 활동에 참석했음이 내심 고통인 만큼,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불현듯 던진 찬사가 진심일 것이라 믿고 싶어졌을 것, 그 탓까?  '시낭송'이라는 단어가 나를 움직였다.


#.

시낭송 밴드에 가입하고  곧바로 해당 밴드가 여는 면 회의참가하고ㅡ  이것이 올 가을 내가 들어선 새로운 길이었다.


물론 나는 낭송은커녕 낭독도 제대로 익힌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주했달까, 아님 내 특유의 게으름 탓일까, 난 밴드 소식에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낭송연습등한한 편이었다. 시낭송회 당일엔, 낭송이란 전문성 면에서  발표자 중 가장 뒤떨어진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하지만 낭송회를 마치고 나는  상쾌했다.  

걸어보지 않아 아쉬운 길을 남기않았으므로.


#.

그날 저녁엔 전체 회식었다. 한 달 겨우 넘긴 신입회원인 나로선 첫 회식이었는데, 내 옆엔 '프레쉬'란  별명으로 불리는 여인이 앉았다. 그녀는 나보다도 더 신참이었던 탓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맥주잔을 들어 다같이 건배를  한 후에 문득 그녀가 말한다. 투명한 맥주잔을 가리키며.


"사람은 이 유리잔과 같습니다. 여기에 빨간 물이 부어지면 빨갛게 비치겠지만 영원히 빨강으로 고정된 게 아닙니다. 다시 파란 물에 파랗게 비치기도 하고 비워지기도 하고 그렇겠지요? 그걸 한 번 본 빨간빛으로 유리잔, 넌 빨개,라고 평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는 프레쉬의 말이 불교의 중관(공空) 사상에 통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

불교의  "공"사상은 공空이라는 한자의 액면 그대로의 뜻으로 인하여, 자칫  없음, 텅빔, 무상无常, 등의 허무주의를 연상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부처의 눈으로 본 세계관, 우주삼라만상은 홀로 가만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논리이다. 인간 생명도 어느 한 가지 단계로 정해진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성장시켜 갈 수 있다.거기에 '불계를 열어간다(성불)'는 실천이 필요하고 이를 보살도라고 일컬었다.현대어로 해석하면, 보살도 즉 인간주의의 길, 생명존중의 행동이라 할 것이다.


인도의 불교철학자 용수는 불교의 가르침을 대승적 관점에서 연기설 (중관)사상을 포착 해석다.  우주를 무수한 개별(삼라만상)이  서로 촘촘하게 연결된 거대한 생명체로 (*연기설缘起说)   유기적이며 역동적인 생명현상을 낮은 사상이나 견해, 즉 이분법적 사고나 그  집착으로 가려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며 대승불교사상의 논리를 다져준 것이다.


용수의 중관학은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에 전래되어  이후 한중일의 불교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아다시피 불교수행의  최고 목적은 "성불"이.  성불이란 자신의 내면에 갖춰져 있는 불성을 열어 나타낸다는 이다. 다시 말해, 우리들 마음 안의 최고의 선성善性을 불성이라 한다면, 그 선성을 일으켜갈 때(성불)  자신도 주위도 보다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성불이란 절대 금부처와 같은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자의 행복을 위해 기원하고 행동하는 기꺼운 마음과 행동에 그 실천자는 물론 주위환경의 생명경애까지 함께 향상된다. 이러한 생명원리를 받아들인 실천을 대승불교의 보살도라 한다. 


현대인에게 타자를 위한 헌신을 말하면 제일 먼저 손해, 희생이란 단어가 떠오를 테지만, 대승불교의 보살도는 이타행에 자타구제의 묘가 있다. 다시 말해 남을 행복하게 하는 과정 속에 자신까지도 구제되이다. 


불교는 현상 이면의 마음을  탐구하는 최고의 심리학이다. 생명철학이다. 게다가 단순한 학문이 아니다. 나 자신의 선한 행동(자력)대우주의 도움(타력)을 불러모으니  이것은  종교 신앙의 영역이다.


불교에서는 어떠한 생명에도 불성이 있고 누구든지 올바른 수행을 통해 성불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모든 경전이 다 그 점을 밝힌 건 아나다. 대승불전인 <법화경>, <열반경>에서 비로소 아무 제한 없는 성불론이 설해진다. 대승과 불성을 중시한 동북아시아 불교권에서는, 이러한 대승경전을 근거로 하여, 인간은 바른 사상통해서 내면변혁은 물론 환경마저 전환해 갈 수 있다는   "의정불이(주체와 환경은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 세계관이 수립되었다.


내친 김에 설명이 길어졌지만, 인도 석존의 가르침은 중관학과 유식학이란 대승의 양대학파로 집성되어 그것이  중국에 이르러 대승사상으로 꽃피었다.  동북아의 대승 사상 민중을 일깨워 고뇌의 현실에 적극으 맞서 나가는  낙관주의의 문화를 이루었다고 요약할 수 았다.


#.

내가 유리컵 비유불교사에서 용수의 중관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떠올리고 있을 때,  프레쉬는 앞말에 이어 자신의 지난날 이렇게 전한.


"... 죽으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죽을 뻔 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던 여자랍니다."


 나는 놀라는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아 온 몇 십 년의 세월을 단 두 줄의 문장으로  압축해 전하는 이 여성은 대체 누구인가.


#.

"시간의 모래 위에 불멸의 발자국".

빅터 프랭클의 말이다. 그의 제시어 "삶의 논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언제나  인간은 좋든 싫든 자기 존재의 기념비가 될 만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 낸 달력 뒷장에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고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은 사람과 같다. "


이렇게 풍부하고 충실한 삶의 기록들을 가진 이라면  무엇 때문에 젊은이를 부러워하겠는가.


"용감하게 견뎌 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가 자신의 과거 속에 아로새겨진 것을  즐거이 반추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현재 남들의 주목을 받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해도, 혹은 젊은이 위주의 현대 사회에서 조금쯤 가련한 노인으로 취급받으며 살더라도, 불멸의 발자국과 같은 지나온 시간으로 삶의 긍지가 단단해졌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말해  이 사람은 존엄한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를 훌륭하게 체현한 자이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달리 말해 이기적 본능을 극복한 인간다움의 행동다. 


프랭클의 이전, 서구심리학계의 이론을 적용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극히 제한된 빵 배급으로 모두가 배를 곯으며 강제 노동을 해야하는 나날 속에 인간이 어떻게 변해갈지는 불보듯 뻔하다. 분명 인간성은 사라지고 짐승성이 표출될 것이다. ㅡ  자연과학적 시각에서 내려진 예측이다.


하지만 죽음의 수용소 안의 수인들에게서 빅터 프랭클은  짐승을 봄과 동시에 성자도 보았다. 이 체험관찰의 결론으로 그는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어떻게 살지 방향을 정할 수 있다. 매순간 스스로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지 결정하는 주체이다. 자유가 아무리 제한된 경우여도, 예를 들어 가장 비참하고 가장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 처했더라도 인간이 태도 선택의 주체임은 변치 않는다.


위기상황에서조차 생존본능에 매몰된 이기태도를 택하지 않고 상호존중과 사랑의 실천인 이타적 태도를  자신의 행동으로 결정한 자는, 그  선택과 결정그의 삶을  불멸의 가치로 끌어올릴 것이다. 행위의 시간은 과거가 됨과 동시에  영원히 보존된다. 연속된 점철로 인간적 긍지를 다했다면, 그에게 과거는 얼마나 멋진 보물창고일 것인가.


인간으로서 택한 태도, 바로 여기  수많은 절망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답이 있다.


현실은 한없이 지리멸렬하고 인간의 삶은 너무나 무의미하지 않은가.  허무주의에 통하는 현대인의 공허감. 우울증 자살충동 등 수많은 범시대적 신경증은 충분한 이유를 안고 있다.


때문에 정신의학자로서 빅터 프랭클은 그 답을 모색하는데 생명을 다 바쳤다. 그의 저서들이 그 결실이다. 진지한 해법이자 새로운  모색이다.


빅터 프랭클 자신이 고통 속에 도달한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에게 복음을 전한다. "살아갈 의미"에 있어, 우리는 그에게  더욱 신세를 져도 된다.  


사람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얼마나 숭고한지. 는 인간은 누구나 숭고해질 수 있다고 격려한다.


숭고함으로의 길은 나의 태도에 달려있다.

무의미와 무상함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으려면, 인류는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과 고난 혹은  인간을 기계처럼 보는 현대사회의 시류까지도 인간이라는 주체가 가진 선택의 자유로써   의미와 방향을 정해 수가 있다. 그것을 자각할 때 지구는 분명 더 나은 세계로 전환될 것이다.


21세기의 인류가 나아갈 길은,  이제까지  주체로서의  선택에 주저했던 "인간다움의 길", "인간 자신의 길"이다. 빅터 프랭클의 깨달음은 일면 소포클레스의  3대 비극에서 표현한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피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와도 같고, 종교에서 설하는  사랑의 실천에 통하고 있다.


*인용출처: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파주: 청아출판사, 2020,178ㅡ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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