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의 소수 종파가 쓴 「유다복음」에 관한 기록
요한복음 13:21~30[200주년 신약성서]
13:21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심령이 산란하여 비장하게 말씀하셨다. "진실히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여러분 중의 한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배신의 아이콘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배신을 기점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은 삼십 냥에 판 가룟 유다의 최후에 관한 묘사는 아주 끔찍합니다. 그는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배에서 창자가 터져 나와 밭이 피로 물들었다는 섬뜩한 표현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
19세기 말쯤에 기독교계를 놀라게 한 발견이 있었습니다. 바로 영지주의 한 분파에서 쓰인 유다복음의 발견이었습니다. 유다복음은 초기 기독교 시대에 쓰인 거짓된 성경입니다. 기독교 교부들로부터 위경(거짓된 성경)으로 분류가 되었는데,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모욕하는 묘사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복음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그의 배신은 사전에 예수님이 그에게 내린 비밀스러운 명령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유다복음대로라면 원래 그가 예수께 순종하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따랐기에, “선생님,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묻자, 이 땅의 비밀스럽고 놀라운 지식을 가르쳐주셨고, 그 이후로 배신이야말로 모든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을 여는 열쇠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 관한 묘사도 담겨 있는데, 가룟 유다를 제외한 다른 열한 명의 제자들은 그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괄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만이 열두 제자 중에 참된 제자이며, 다른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수와의 깊은 영적 유대를 이루어 냈고, 감춰진 하나님의 지식을 깨친 자로 소개됩니다. 고통과 고독 속에서 이루어 낸 그의 배신은 다름이 아닌 영광스러운 희생이었습니다.
신약의 네 권의 복음서와 서신서를 모두 거짓된 내용으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정말로 유다복음이 잃어버렸던 복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유다복음이 왜 외경인가, 하는 문제를 명확하게 신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은 복잡하고 긴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순만 찾아본다면 단순한 시각으로 보아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배신이 영광스러운 희생이 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에서 가룟 유다라는 제자의 배신이 없어서는 안 될 의존적인 존재로 추락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유다복음의 세계관 안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인류를 대속할 구원자가 되기에는 무척이나 불완전해 보입니다.
차라리, 예수님보다 그 위경에서 묘사된 가룟 유다가 십자가에 매달려야 더 많은 인류를 천국으로 보낼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갖춘 영광스러운 자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유다복음에는 예수가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모순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따라서 유다복음은 거짓이며 억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스스로 적그리스도라고 증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27절, “그가 빵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지금 대한민국은 거짓과 억지 주장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해야 의무를 지닌 자가 국민에게 총을 겨누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자는 자신이 국민을 배신하는 일이 자유 민주국가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영광스럽고도 희생적인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배신자의 복음입니다.
유다복음을 집필한 영지주의의 소수 종파는 역사 속에서 소리소문없이 소멸하여 더 이상 연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거짓과 억지 주장을 엮어 복음이라며 그들이 남긴 건, 추종하는 계파와 사람도, 유적과 유물도, 사건과 역사의 흔적도 그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썩다 만 파피루스 한 장뿐입니다.
사탄을 아비로 두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거짓과 허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쌓았습니다.
이제 곧 국민을 배신한 내란 수괴와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자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