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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영 Oct 14. 2023

글을 쓰겠다고라? 뭔 놈의 글을 쓴다고, 쩝!

-쇼펜하우어의 <쇼펜하우어 문장론>을 읽고-

  글쓰기에 고전(苦戰)하던 중, 글쓰기 고전(古典)을 만났다. 그간 내가 읽었던 글쓰기에 관한 책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쓴 책이다. 다들 그렇고 그런 얘기. 어휘력을 늘려라. 접속사를 남발하지 마라. 형용사나 부사를 줄여라. 장문보다는 단문을 써라. 문단은 이렇게 써라. 구성은 이렇게 해라. 독자에게 임팩트 있는 글을 써라. 진정성 있게 써라. 그렇게 많은 이론적인 말들을 많이 들었는데 실제 문장으로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 책만 읽으면 글을 잘 쓸 수 있겠지?' '이 강의만 들으면 잘 쓸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글을 쓰지는 않고, 이론에만 기웃거렸으니 글쓰기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글쓰기에 눈뜨기 전에는 책에 관심이 많았다. 체계도 없이 이 책 저 책 잡식을 했다. 글을 쓰기보다는 읽기가 편했다. 왜 그렇게 글쓰기는 하지 않고 책에만 매달렸는지 쇼펜하우어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바로 <쇼펜하우어 문장론>이다. 다소 투박하고 거침없는 표현이 많아서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강경하고 확신에 찬 어조와 문체는 글쓰기에 입문하려는 내게 필요한 '쓴소리'였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자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그의 작품 중 대표작으로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있다. 그 책은 아직 읽지 못했으나 조만간 읽어보려고 한다.


  그간 글은 쓰지 않고 독서에만 치중했던 이유는 내가 게으른 탓이었다. 사유하지는 않고 저자의 사유에만 매달린 것이 문제였다. 나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않고 저자가 간 길만 따라가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예로 들었듯이, 선생님이 써 준 글자 위에 덮어쓰기로 따라 쓰는 행위. 자기 필체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얼마나 간편한가. 글자를 따라 쓰는 행위에는 사색이 필요 없다. 마찬가지로 사색이 없는 독서는 편하다. 편하기 때문에 글은 쓰지 않고 주야장천 독서만 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뼈저린 반성을 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사색이 없는 다독(多讀)을 경계했다. 사색이 없는 다독의 폐해를 용수철에 빗대어 설명했다. 압력이 너무 높아도 용수철은 탄력을 잃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였다. 독서는 어디까지나 타인이 행한 사색의 결과라고 하면서 사색 없는 다독을 부정한다. 독서는 사색이 안 될 때, 이를 만회하기 위한 휴식으로 사용하라고 조언한다. 흐트러진 생각으로 괴로울 때 책을 잡으라고 충고한다. 진정으로 사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저자에 의해 가공된 인공적인 현실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찾으라고 도움말한다.


  사색과 독서는 글쓰기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만이 생존한다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말을 '적는(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패러디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사색을 많이 하여도 글로써 남겨 놓지 않으면 공허해질 뿐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생각과 느낌을 써 놓지 않으면 되돌려 찾아내기 어렵다. 상황과 인식은 변한다. 그러니 바로바로 문자로 기록해야 한다.


  저자는 <쇼펜하우어 문장론>에서, 작문 기술에 연연하는 글쓰기는 연금술사의 헛된 노력에 불과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금은 결코 변하지 않는 가치이며, 원래부터 금이었다. 그러나 연금술사들은 금의 대용품을 만들어내고자 무모한 연구와 어리석은 시도를 반복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붓을 들고 글을 쓰려는 자는 대용품을 추구해서는 안되고,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정신의 이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낡은 물레방아처럼 끝없이 돌면서 독자의 눈을 어지럽히지 말라고 한다.


  옮긴이 김욱의 말을 들어보면, <문장론>은 쇼펜하우어 만년(63세)의 저작인 인생론집 <여록과 보유> 중에서 사색, 독서, 저술과 문체에 관한 부분을 옮기고 제목을 <쇼펜하우어 문장론>으로 정했다. 알아보니, 일본어중역서이다. 놀라운 것은 현대에 쓰인 글쓰기 책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 63세이면 1851년이다. 어느 때인가, 감이 오지 않아 우리나라 역사를 잠시 찾아보았다. 1851년은 조선 철종이 재위하던 시기(1849~1863)였다. 철종 연간은 지배층에 의한 농민 수탈이 절정을 이룬 시기로 민란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 탄생하기도 했다. 아, 1851년에 명성황후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 시기에 독일의 쇼펜하우어는 글쓰기와 비평에 관한 글을 썼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독일어-일본어-한국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현대에 맞게 번역을 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1851년, 그 시기에 현대 글쓰기 교본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오히려 현대의 글쓰기 책 보다 광범위하면서도 구체적이다. 그리고 철학적이다.


  자신이 쓴 글이 남에게 도움이 될까 걱정하는 '착한' 작가가 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글은 남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잘 쓴 글은 남에게 본보기가 되거나 지혜나 지식을 줄 것이다. 잘 못 쓴 글은 남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아, 이 정도로 써도 되는구나.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 하는 용기를 북돋을 수 있으니, 그 또한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 정도는 나도 쓰겠네, 하고 책상 위에 던진 책도 있다. 그 책을 여기에 예시로 들 수는 없다. 그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것이니까. 어쩌면 미래에 쓸 내 책도 그런 푸대접을 받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독자 마음 나도 아니까.(웃음)


  쇼펜하우어가 나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글을 쓰겠다고라? 뭔 놈의 글을 쓴다고, 쩝! 이 책 한 번 읽어봐." 하면서 <쇼펜하우어 문장론>을 건넸을 것 같다. 고교시절,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 또는 비관주의자라고만 외웠다. 얼마나 겉핥기식으로 배웠던가. 이 책에는 집필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저술과 비평가에 대한 비평 챕터가 나온다. 그의 비평은 단순하지 않다. 인생과 세계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그의 사상은 후대 철학자, 예술가 등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다. 21세기를 사는 나에게까지 말이다. 다시 삼독 사독, 글쓰기의 방향을 잃을 때마다 읽어야겠다.



쇼펜하우어, 김욱 옮김, <쇼펜하우어 문장론>( 지훈출판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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