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자의 행복
예전보다 눈물이 많아졌다. 노화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 때문일까, 자동 작동하는 ‘거울 신경세포’의 활성화때문일까? 누군가의 눈물을 보면 어느새 나의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나와 직접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더라도 재난이나 사고 뉴스,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이 당한 고통과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할 때 운다. 결혼식, 올림픽 경기나 야구 관람, 음악 경연이나 각종 시상식에서 누군가 큰 상을 받는 모습만 봐도 절로 감격해서 눈물이 난다. 나와 타자의 슬픔과 고통에 울고, 기쁨과 행복에도 운다.
문득 눈물이 메마르면 어떻게 될까 상상의 나래를 펴 본다.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 삭막하다. 감정이 메말라 외부 자극에 더 이상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된다면 웃을 일도 울 일도 많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봐도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재미없고, 시시하고, 매력 없고, 건조하고, 외롭고, 무엇보다 인간적이지 않다. 눈물 없는 세상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흥겨운 음악에도 어깨를 들썩이지 않고, 슬퍼 통곡하는 사람을 보고도 함께 울어주지 않는 공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공동체에서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감정의 공명은 서로를 인간답게 성장시키는 정서지능이자 사회적 능력이다.
영화 [이퀼리브리엄 Equilibrium](2002)에는 인간의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는 가상 사회가 등장한다. 목적은 감정을 차단함으로써 갈등과 폭력 없는 평화 세계를 구축하기 위함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은 의무적으로 감정 통제 약물을 복용해야 하며, 약을 먹으면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일부에서는 약물을 거부함으로써 감정 통제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무리가 생겨나고, 이들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색출 및 제거 대상이 된다. 더욱이 감정을 느끼도록 영감을 주는 시, 문학, 그림, 음반 등 문화 예술적 도구는 발각되는 즉시 불태워진다. 감정을 통제하려는 무리와, 자기감정을 지키고자 목숨까지 내걸고 격렬히 저항하는 무리의 대결 구도에서 흘러 나오는 긴장감이 숨 막힌다. 영화를 보고 나면 잠시 세상이 달리 보인다. 내 곁에 당연히 존재하고 있던 모든 것들에 대한 신기함과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작고 사소한 일상의 오브제가 사랑스럽고 소중해진다. 꽃 한 송이,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 무심히 날아가는 참새의 날갯짓마저 경이롭다.
I live, I breathe, I feel.
일본에서는 울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우는 [루이카스: 누활淚活] 모임이 있다고 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툴고, 남에게 피해를 줄까 봐 크게 울지 않는 것을 예의로 생각하는 일본인에게 안성맞춤인 활동같다.모임의 성격상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나 영화, 낮은 조명, 울고 싶다는 욕구의 동질성이 묘하게 버무려지는 순간 사람들은 눈물을 펑펑 쏟는다고 한다. 눈물을 참거나,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오히려 더 자주, 더 많이, 더 당당하게 격렬하게 눈물 흘려도 괜찮다.
나는 아직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대중 강연 중 아버지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할 때면 어김없이 눈물이 나서 곤욕을 치른다.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는 상실의 슬픔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것 같다. 굳이 눈물의 치유 효과에 관련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경험상 눈물에는 분명 긍정적 효과가 있음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한바탕 눈물 흘리고 나면 마음이 시원하게 정화되고 단정해진다. 특히 홀로 우는 시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내 삶에 초대하는 마법의 순간 같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물이 터지면 그와 동시에 ‘괜찮다’는 위로와 안도감이 밀려온다. 다 울고 난 후 내 마음은 다시 평화로워지고 단단해져 있다. 그러면 다시 호탕하게 웃을 수 있다. 눈물이 많아질수록 눈물 예찬론자가 되어간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