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치유하는 독특한 애도 방법
살면서 '다음에', '언제 한 번'이라는 말로 시작된 약속을 지켰던 기억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 내게 했던 약속도 그냥 하는 말인 경우가 많았다. 약속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두는 것'이다. 구체적인 때를 전제로 한 약속이라는 의미로 '기약'이라는 예쁜 단어가 눈에 띈다. 인간관계에서 기약 없는 약속의 남발은 신뢰를 깨트린다. 잦은 약속의 불이행으로 실망감이 쌓이다 보면, 둘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가도 딱히 서로 기대할 게 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
약속이 단지 언어유희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실현되는 것을 볼 때 흡족한 감동이 몰려온다.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 Last Dance>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내와 생전에 했던 약속을 지킴으로써 사랑을 완성하는 노년의 한 남자 이야기다. 제르맹은 은퇴 후 여느 때처럼 아내 리즈가 챙겨주는 아침을 먹으며, 느긋한 대화로 하루를 시작한다. 각자 좋아하는 것을 하며 활기찬 에너지를 뿜어내는 노부부의 삶이 평온하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아내 리즈가 갑자기 죽는다.
아내 리즈는 죽기 전까지 현대무용단에서 춤을 연습하며 다가올 공연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제르맹은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떠나더라도 그가 못다 이루고 간 일을 완수해 주기로 한 부부의 약속을 떠올리며 아내 대신 춤을 추기로 결심한다. 자식들은 홀로 남은 아버지가 받았을 정신적 충격과 건강에 대한 염려가 크다. 아버지를 살뜰히 돌보기 위한 자식들의 노력이 대단하다. 요일마다 누가 아버지를 챙길 것인지 일과표까지 만들어 그의 삶에 깊숙이 침투한다. 제르맹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자식들의 관심과 애정공세가 오히려 불편하고 달갑지 않다. 자신의 안녕을 체크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질려버린 제르맹은 '오... 나 좀 내버려 둬 줘!' 하는 마음으로 전화기 코드까지 뽑아버린다.
어느 날 제르맹은 아내가 몸담았던 현대 무용단을 찾아가 아내 대신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한다. 무용단을 이끄는 세계적인 무용가 La Ribot은 제르맹의 진심 어린 사연에 흔쾌히 함께 하자며 손을 내민다. 제르맹의 몸짓에 깊은 감명을 받은 단장은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그를 주인공으로 공연 콘셉트마저 다 바꿔버린다. 제르맹은 난생처음 남들 앞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 그것도 몸으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일이 쑥스럽고 서툴고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조금씩 적응해 간다. 그는 몸을 움직이면서 뜻밖에 찾아온 기쁨에 어쩔 줄 모른다. 사람들과 춤을 추는 공간에서 말없이 몸으로 호흡하고 소통하는 가운데 왜 아내가 그토록 춤을 사랑했는지 알 것만 같은 희열에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제르맹에게 무용 공간은 춤을 추는 곳 이상의 의미다. 사람들과 어울려 몸을 움직이는 공간은 이제 상실의 슬픔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는 이 공간에서 충분히 아내의 숨결을 느끼며, 아내의 삶에 진심으로 공감한다. 그의 삶도 서서히 넘치는 기쁨과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진다.
대개 사랑은 서로에게 매혹되어 헤어 나올 수 없이 빠져드는 감정으로 시작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오래도록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아끼고, 돌보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지지하고, 오래 참아주려는 의지의 발동과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대상을 아끼기 때문에 그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도록 허용할 수 있어야 하고, 그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면 나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사랑이란 상대를 꼼짝 못 하게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장 그 다운 모습으로 기능하고 존재하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존재적 사랑의 밑바탕에는 상대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중이 깔려 있다.
엄마와의 애착이 잘 형성된 아기는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나 독립하더라도 새로운 환경의 변화에 안정적으로 적응한다. 엄마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아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결속으로 인한 긍정적 영향력은 부부관계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오랜 세월 사랑과 우정을 바탕으로 두터운 신뢰를 쌓아온 부부의 경우 누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서로 살아가는 시공간만 달라질 뿐이다.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을 서둘러 잊을 필요도 없다. 그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추억을 곱씹고, 원할 때마다 언제든 그를 떠올리며 지금-여기에서 충분히 애도의 시간을 가지면 된다. 사랑하는 이를 마음으로 더 많이 더 자주 떠올리면서, 함께 나누었던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때 남겨진 자기 삶의 의미 또한 더욱 풍부하게 채워질 것이다. 두 사람을 이어주었던 사랑의 끈은 삶과 죽음을 넘어서 영원히 유효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