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따의 기억
다행히 엄마는 집에 없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안방 화장실로 뛰어갔다. 문을 잠그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친구의 말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그녀는 내 눈을 옆으로 피하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 시험지 찢은 날 있잖아. 애들이 너 재수 없다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나타나면 분위기가 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반복되니 더는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지 일주일 정도 지나서야 그나마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친구에게 사정해서 이유를 알아낸 거다.
고작 그 시험지 때문에.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본 중간고사였다. 좋은 성적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받아 본 성적표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순간 짜증이 확 났다. 부모님도 많이 기대하고 계실 텐데, 성적이 이게 뭐람. 나는 성적표를 반으로 찢고 동그란 공 모양으로 구겨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때 성적표를 못마땅해 하던 내 모습을 반 아이들 몇 명이 보았던 모양이다.
한동안 멍하게 타일 바닥에 앉아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중학교 3년 내내 왕따를 당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부모님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실망스러운 성적에, 왕따 이야기까지? 아빠는 밤늦게 회사에서 퇴근했고, 엄마는 대학교 시간 강사로 일하느라 저녁 5시는 되어야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저리기 시작했던 다리를 쭉 펴고 화장실 거울을 보고 섰다. 재수 없어 보이지 않으려면, 잘난 체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둥글둥글해보이려면 미소를 지어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고 웃어보았다. 입술을 다물고 아무리 입 꼬리를 올리려고 해도 되질 않았다. 윗니를 드러내 볼까. 그게 조금 나아보였지만, 아무래도 어색했다. 화가 났다. 나는 고작 웃는 것도 못하는 구나. 자신이 몹시 미웠다. 찰싹- 손바닥으로 내 뺨을 세게 쳤다. 정신 차려. 조금 더 잘해보라고.
그 다음날부터 나는 교실에서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상자를 뒤집어쓰고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숙자처럼 몸을 숨겼다. 교실은 내가 속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바로 뿌리가 뽑히고 배제될 위험한 곳이었다. 내가 눈에 띌 때는 오직 ‘친절하고 착한’ 아이로만 보여야 했다.
반 친구들이 부탁하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누군가 아프면 무조건 자원해서 청소를 대신 했고, 부모님이 과자를 사주면 가방에 챙겨왔다가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자해를 해 가며 열심히 연습했던 상냥한 미소를 장착하고서. 하교 후 집에 도착하면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날 교실에서 있었던 일을 복기하며 조금이라도 어긋난 것 같은 부분이 있다면 또 자해를 반복했다.
1년 정도 비슷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어떻게 조금씩 상황이 나아졌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왕따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의 관계를 또 망칠 까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 친구들 무리에 속할 수 있게 되었고, 중학교 3학년 때에는 반장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그때 나는 혹시 튀게 될까 봐 무서워서 겉으로는 웃으면서 극구 사양했다. 그 날은 하교 후 안방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에 기대어 한참을 울었다. 안도의 눈물이었다.
잘 극복했습니다, 라고 끝낼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왕따의 경험은 여전히 내 몸에 새겨져 있었다. 재작년 어느 모임에서 나는 내 글에 대한 피드백을 이렇게 해주었으면 한다고 의견을 냈다. 내가 글에 의견을 덧붙이고 난 뒤로, 그에 대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멤버들이 서로 라포가 형성되기 전이어서 어색했는지, 내 의견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에는 다들 바쁠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30분에 한 번씩, 10분에 한 번씩, 나중에는 5분에 한 번씩 댓글이 달렸는지 체크했다. 덧붙인 부분을 지우고 싶었지만 이미 조회 수가 매우 높았다. 그간 잘 지내왔는데, 여기서 잘난 척을 했구나. 주제넘게 아는 척을 했구나. 만나서 한 명 한 명 사과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큰일이다. 일을 완전히 망쳐버렸구나. 왕따 당하면 앞으로 몇 달 동안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은 끝도 없이 뻗어나갔고, 잠글 수 없는 수도꼭지처럼 눈물도 쏟아졌다. 숨이 조금씩 가빠왔다.
그날 저녁에 줌으로 모임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불안을 진정 시킬 수 없었다. 돌아가면서 근황을 공유하는 시간에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면서 댓글과 관련해서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말했다. 정 내가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그만 둘 생각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출구가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모임이 끝나고 나서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어 숨을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작년 여름, 홍승은 작가님 글쓰기 첫 수업 시간에 합평을 할 때 지킬 것들에 대해 배웠다. 타인의 삶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차별·혐오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사실 사람 사이에 언제나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 뒤로 이어진 작가님의 이야기가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같이 염두에 두고 있기로 해요.”
수업이 끝나고 그 말을 곱씹다가 ‘안전한 공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안전한 공간이란 내가 나 자신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간,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함부로 재단되지 않는 공간, 그리고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제대로 사과하고 행동을 고치면 배제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중학교 때 친한 친구가 ‘야 너 재수 없게 왜 그래. 그러지 마.’라고 웃으며 말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나도 꿀밤 한 대 맞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그러네. 야야 미안하다.’라고 대꾸할 수 있었을까? 물론 성적표를 찢는 행동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거나, 엄청난 잘못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다만 무한경쟁사회인 한국에서 청소년들에게 충분히 재수 없어 보일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실수이든, 실수가 아니든. 나에게는 그 일에 대해 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한 번의 행동으로 낙인이 찍혀버리고, 나는 자책과 자해 사이에서 방황했다.
아직도 나는 극한의 스트레스에 몰리면 자해를 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하는 내 몸을 벌주는 일은 너무나 쉽다. 나를 때리면 순간 아픔과 동시에 그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상황의 일부를 통제했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언제까지 나를 학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안전한 공간을 떠올려본다. 내가 나 자신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주면 어떨까. 외부에서 안전한 공간을 찾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 속에서 실수를 한 나를 보듬어줄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나는 화장실에서 울고 있던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다가간다. 실수를 해도 괜찮아. 이게 끝이 아니야. 실수가 맞다면 정확하게 사과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면 돼. 언제든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어. 문은 닫히지 않았어.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어린 나를 일으켜 세워서 따듯한 물을 먹이고 등을 쓸어준다. 나는 너를 믿어. 너는 충분히 사랑 받을 가치가 있어. 다 지나갈 거야. 뭐든 언젠가는 지나가더라고. 어린 나는 나의 손을 꼭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