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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by 오행

나만의 취향으로 가득 찬 플리(플레이리스트), 좋아하는 바질 향이 섞인 향수와 디퓨저, 선호하는 브랜드에서 구매한 의류, 자주 가는 단골 음식점. 취향이 확고했던 시절 나의 하루하루를 채워주던 것들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가는 사람들과 웃고 떠드느라 나와 결이 다른 사람들에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취향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 혹은 사람들로만 주변을 채워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만의 색깔을 지울수록 큰 어려움 없이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내 가치관보다는 상사의 입맛에 맞게 일했고, 일이 아니었다면 마주치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렸다. 제법 제대로 된 사회생활 미소를 갖추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취향이 확고하던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친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날 친구가 했던 한 마디가 내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요즘엔 무슨 노래 들어? 너랑 나랑 음악 취향이 비슷했잖아.


당시에 나는 음악을 잘 듣지 않았다. 통근할 땐 주로 유튜브 영상을 봤고, 집에서 가끔 음악 플레이리스트 채널 'Essential'을 틀어놓는 정도였다. 0.5초 정도 멍해졌다가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20대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직장도 잘 선택한 친구였다. 친구의 질문에 그냥 "맞아, 그랬었지" 정도의 대답밖엔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너무 팍팍하고 메마르게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집-회사-집을 오가며 내가 아닌 나로 지내고 있었다. 그때부터 취향을 복기했다.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를 다시 플레이리스트에 담았다. 어플리케이션에서 추천해 주는 음악 중에서 마음에 드는 곡들을 엄선해서 리스트에 채워 넣었다. 덕분에 그간 놓치고 있던 명곡을 새롭게 접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향이 담긴 디퓨저를 샀다. 회사 주변에 있는 맛집과 카페, 플래그쉽 스토어 중에 가고 싶은 곳을 골라 지도 어플에 '즐겨찾기' 해 두었다.


한동안 부지런하게 채운 취향 곳간은 금세 차올랐다. 이 과정 속에서 작은 것에도 행복해하던 어릴 적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회사에선 무색무취로 있다가도 회사 밖으로 나오는 순간 새로운 시계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취향 찾기로 시작한 나의 여정은 작지만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


나는 앞으로 누군가가 삶이 무료하다고 한다면 취향을 따라 움직여 보라고 하고 싶다. 혹시 자신의 취향을 모르겠다면 이것저것 경험하며 그걸 알아보라고 하겠다. 취향으로 채워진 인생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쁨을 누릴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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