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롬쇠 여행 5일 차. 지금까지 오로라도 보고 순록도 봤다. 겨울 노르웨이에서 즐길 수 있는 건 다 즐긴 것 같은데, 아직 남아 있는 게 있다. 바로 웨일 와칭(Whale Watching) 투어다. 우영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고래를 좋아하는 편인 나는 야생 고래를 볼 수 있는 나라에 가면 최대한 웨일 와칭을 하고 오는 편이다. 트롬쇠에서는 혹등고래와 범고래를 관찰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야생 범고래는 어릴 적부터 꼭 실물을 보고 싶었던 종이라 매우 설레는 마음으로 투어를 신청했다.
웨일 와칭 투어의 경우 말 그대로 'Whale'을 'Watching' 하는 투어이기 때문에 고래가 스스로 다가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먼 거리에서만 고래를 관찰할 수 있다. 호기심이 많은 범고래는 투어 보트 가까이에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 다만, 11월에서 1월 사이가 북극해로 가는 범고래를 관찰하기 좋은 시기라고 하는데 우리가 방문한 시기는 1월 말이라 범고래를 볼 수 있는 확률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오전 8시 30분쯤 트롬쇠 항구에서 투어 보트를 탔다. 뱃멀미가 심한 나는 단단히 준비하고 갔다. 전날 약국에서 산 멀미약을 미리 챙겨 먹고,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멀미 방지 안경까지 착용했다. 멀미 방지 안경은 살짝 우스꽝스러워서 배에 탄 사람들이 슬쩍슬쩍 나를 쳐다봤지만 괜찮았다. 멀미약을 먹어도 뱃멀미하던 내가 투어 내내 거친 파도 속에서도 고래 동영상을 찍고 셀카까지 찍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 멀미 방지 안경은 내 인생템이 됐다.
배가 출발하자 가이드가 투어에서 어떤 종류의 고래들을 볼 수 있는지 설명해 줬다. 참고래(Fin Whale)와 혹등고래(Humpback Whale), 밍크고래(Minke Whale), 범고래(Orca), 사향고래(Sperm Whale), 쇠돌고래(Harbor Porpoise)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전날에는 혹등고래를 관찰했다고 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개인적으로 사향고래는 뉴질랜드에서 웨일 와칭 투어를 갔을 때 봤던 종이라서 다른 고래들을 보고 싶었다.
한참 동안 배를 타고 가는데도 고래가 보이지 않았다. 가이드는 조금 더 북쪽으로 이동해야겠다는 안내를 해 주었다. 배 안에서 쉬던 나는 배의 속도가 잦아들자 야외 선미로 나갔다. 거센 바닷바람과 함께 바닷물이 튀었지만 굴하지 않고 고래를 찾았다. 내 바로 옆에는 전문 고래 연구원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웬 대포 카메라를 들어 바다를 촬영하더니 가이드에게 사향고래가 있다고 일러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바윗돌 같은 사향고래의 이마 부분이 보였다.
가이드가 마이크를 들어 사향고래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방송해 주었다. 이미 선미 제일 앞에 있던 나는 열심히 동영상을 찍어댔다. (브런치에 올릴 사진을 찾다 보니 동영상밖에 없어서 동영상을 캡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면 위로 물만 뿜던 사향고래 한 마리가 꼬리를 뽐내며 바다로 들어가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 역시 사향고래 말고 다른 고래를 보고 싶었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입을 벌린 채 사향고래 무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수면 위를 맴돌며 물을 뿜어댔다.
배가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도 고래 무리가 있었다. 범고래일까 기대했지만 사향고래 무리였다. 이곳에서도 무리 중 한 마리가 바다로 잠수하며 예쁜 꼬리를 보여줬다. 사람들은 또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고래도 자신의 인기를 알아서 더 우아하게 꼬리를 집어넣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가이드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파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어 항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11시 반에 시작한 웨일 와칭이 12시 반에 끝나버렸다. 보통은 2시간까지도 본다고 하는데, 날씨가 야속했다. 어떻게 보면 범고래를 (혹은 혹등고래를) 보기 위해 신청한 투어인데 한 마리도 보지 못해 슬프기까지 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와 범고래의 인연은 노르웨이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건가보다, 하고 아쉬움을 달랬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짝꿍에서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하는 범고래 투어를 보여주며 다음엔 이곳을 가자고 설득했더니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