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안녕하세요. 비록 제 자신이지만 인생 선배이기에 한 말씀 올리기 앞서 정중히 인사드립니다. 먼저 너무 고생했고 수고하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생각과 행동들로 인해, 비록 그 생각과 행동들이 제 자신을 만든 것이긴 해도, 수많은 시행착오에 고생하셨을 미래의 제 자신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0년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올 한해를 돌이켜보면 정말 다사다난한, 기억에 남을만한 해였습니다. 매년 수많은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사람은 이기적이게도 자신과 큰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금방 잊어버리곤 하죠. 그러나 2020년은 코로나 사태라는, 아직도 진행 중인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대유행 때문에 저를 포함한 전세계인들의 삶의 방식이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또 한가지, 제가 속한 의사집단의 큰 총파업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속감과 동기애를 느끼며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과 부조리함, 자신의 행동에 따르는 책임의 크기 등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상처도 받았기에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래의 저희 의사들은 어떤 환경에 놓여져 있나요? 당신은 현재의 제가 느꼈던 감정과 패기, 열정을 녹슬지 않게 가슴에 머금고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자신도 모르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 후 심심한 자기위로를 해가며 살아가고 있나요? 어떠한 삶을 살게 되어도 당신을 원망하진 않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선택한 삶이니까요.
비록 아직 25년이라는 길다고 보면 길고 짧다고 보면 짧은 시간 밖에 살아오지 않았지만, 제 나름대로 그 동안 굉장히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어려서부터 소위 말하는 대치동 키즈로서 의대 진학의 꿈을 안고서 학창시절 대부분을 공부에 매진하며 보냈고, 수능이라는 생애 첫 큰 시험에서 좌절과 실패도 겪으며 재수라는 쓴 고배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의대에 우여곡절 진학 후에 예과 생활동안은 평소 좋아했던 농구 동아리 활동, 여러 동기들과 친분 쌓기, 선배들이 귀에 닳도록 추천한 연애경험 쌓기 등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다사다난했던 노력을 하며 보냈습니다. 본과에 진학해서는 나의 선천적 능력의 한계를 깨달은 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또다시 공부에 매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졸업을 앞둔 본과 4학년이 되었네요.
이처럼 어려서부터 치열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어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겠죠. 학창시절을 공부에 바칠 수 있었던 이유는 장래희망인 의사를 향한 열망과 부모님 및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서. 운동선수도 아닌데 죽어라 농구에 매진하며 매일매일 슛을 몇백개 씩 던지고 눈,비가 내릴 때도 혼자 벤치에서 드리블 연습을 했던 이유는 후에 농구경기에서 주전으로 뛰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선후배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기 때문에. 학교활동만으로도 피곤한데 무리하게 미팅을 잡고 소개팅을 잡고 여러 외부 동아리활동을 했던 이유도 좋은 인연을 만나 연애를 해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나쁘게 나와도 책상에 꾸역꾸역 앉아서 족보와 수업내용을 계속 붙잡고 있었던 것도 나중에 성적으로 후회를 남기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을 하고 그것을 성취해 나갔습니다. 그 과정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험난해도 목표했던 바를 성취했을 때의 쾌감과 설사 목표에 미치지 못했더라도 그 과정이 내 삶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직접 체감했기에 이러한 치열한 노력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간사한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요. 수많은 노력의 과정과 성취를 반복하다 보니 이제 어떠한 목표가 생기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의 정도와 그로 인해 내가 얻게 될 것들, 가능성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성취감의 정도가 대략적으로 어느정도일지 감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주제 넘는 예측이 그동안 노력을 해오며 느꼈던 한계들과 한데 뒤엉켜 ‘어느 정도 이상의 높은 목표는 어차피 안 될거다.’, ‘지금 이 노력을 하는 것은 단지 시간낭비가 될 뿐이다.’, ‘이걸 성취한다 해도 노력의 크기에 비하면 별로 가성비가 좋지 못할 거야.’ 등의 부정적인 생각의 똬리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그 동안 쉼 없이 돌려왔던 나의 삶이라는 공장이, 무엇을 위해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여태 달려왔던 관성에만 의지해 의미 없는 공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을 것이기에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이러한 감정과 비슷한, 혹은 진폭이 훨씬 큰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아직 제대로 된 사회생활조차 시작해보지 않은 작은 우물 안의 개구리임에도 앞으로 제가 마주하게 될 수많은 목표들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피나는 노력, 좌절, 성취감 등이 예상이 되는 듯합니다. 동시에 기대, 설렘, 걱정, 두려움 등 오만가지 감정이 뒤섞여 느껴집니다. 제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당신은 이러한 감정을 극복하고 계속 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목표를 쟁취해 나가고 있나요? 아니라면 피할 수 없는 노력, 성취, 좌절이라는 굴레에 갇혀 끊임없이 쳇바퀴를 돌고 있나요?
요즘 저와 같은 젊은 세대를 보면 비단 제 자신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마치 사회적 번아웃이 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휘황찬란했던 부모님 세대들의 치열한 노력으로 일궈낸 기적을 보며 일찍이 노력과 그에 따른 성취의 정도를 간접체험 했던 우리가, 어쩌면 그 간접체험의 내용과, 직접 맞닥뜨린 잔혹한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전반적으로 삶의 질(QOL)만이 최우선적 가치가 되어버린 삶을 반강제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나아갈 것입니다. 저 자신 또한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겠죠. 그러나 바쁜 삶에 매몰되어 가다가도 이따금씩은 이 글을 읽으며 젊은 날의 제가 느꼈던 감정과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가슴 속 어딘가에 품고 살아가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30대가 된 나의 답)
안녕? 믿기지 않겠지만 2020년과 같은, 아니 훨씬 심한 미래를 알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고 그 한가운데 서있는 중이야. 처음 겪었다면 큰 좌절이었겠지만 2020년에 예방접종을 받아서 그런지 지금은 오히려 이 시간을 즐기고 있어 ㅎㅎ 그 동안 평범한 인생 속에서는 최고가 되기 위해 지금 돌이켜 보면 쉽지 않았던 노력, 그리고 원하는 목표를 이룬 성취 그리고 좌절. 이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지.
그 과정들이 어찌보면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감옥같은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발 물러서서 여유롭게 돌아보니 그 과정들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얻고 나 자신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것 같아. 그 길이 자신의 천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나 자신을 끝까지 몰아치는 법,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컨트롤 하는 법,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루틴을 만드는 법 등등 의식하지 않았지만 쳇바퀴를 돌다 잠시 쉬러 내려오면 내 몸에 체화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러기에 나는 다시 결국 쳇바퀴에 올라 설 거 같아.
그러나 평생 쳇바퀴에서 rat race를 펼치는 삶은 개인적으로 이상향과 멀기에 쳇바퀴에서 내려올 노력도 같이 해 나아갈 생각이야. 그 방법에 대해서는 다방면으로 탐구해보고 있지만 당분간 의업의 길이 주요수단이 되는 것은 피치못하는 방향인 것 같아. 물론 내 인생의 목표 전체가 의업의 길을 따라 걷게 될 것이라는 옛날 순수했던 나의 꿈은 아니지만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 목표에 다다를 때까지는 또 열심히 쳇바퀴를 뛰어야겠지 ㅎㅎ 그 안에서 더욱 나 자신을 단단하게 하며
미래의 내가 이글을 읽을 때는 쳇바퀴에서 여유롭게 뛰며 내려올 준비를 다 맞춰가는 상태였으면 좋겠다 ㅎㅎ 화이팅!